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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 가는 '의사-환자 신뢰감'
[ 2001년 10월 18일 03시 00분 ]
"이제 의사와 환자간에 'Heart to Heart' '이심전심 믿음'을 바라는 것은 옛말입니다." "혹 미안하다는 이야기 잘못했다가는 멱살 잡히고 법정까지 갈지도 모릅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A교수는 "현재 두건의 의료소송에 휩싸여 있다"며 "이젠 나를 희생하며 환자를 보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고 하소연을 털어놨다.

의사와 환자간 절대적 신뢰관계가 급속히 허물어지고 있다. 과거 "의사 말 한마디로 병 낫는다"는 구전은 의료계에서 용도 폐기된지 이미 오래 전.

A교수는 요즘 답답하다. 반신 불수의 치료비도 못 대는 환자를 의사라는 직업적 측면서 병원 눈치를 보며 수술을 했다. 물론 치료비는 병원측에 사정사정해서 무료로 했다.

하지만 환자한테 불가항력적인 부작용이 발생했다. 일종의 알레르기 반응인데 의사인 자신의 능력으로서는 어찌해볼 수 없는 사안이었다.

문제는 이후 발생했다. 환자에 도의적 차원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가 법적인 문제로 비화됐다. "미안하다"는 말이 의사의 잘못을 인정한 증거로 제시된 것이다.

A교수는 주변 교수들한테서 "의사는 함부로 미안하거나 잘못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차후 들었다. 의료계에서는 일종의 불문율이었는데 자신만 몰랐던 것이다.

A교수는 지금도 이 일을 생각하면 인간적 배신에 새삼 회의를 느낀다고 한다. 아직도 소송이 진행중이지만 의사로서 환자를 보는 시각이 예전과 많이 달라지게 됐다. A교수는 "어려운 환자나 위험한 수술은 굳이 맡지 않을려고 한다"며 근래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소개했다.

이같은 현상은 비록 A교수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의사들의 환자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측면이 엷어지는 경향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역으로 일반인들의 의사들에 대한 불신감 증폭도 커지는 실정이다.

40대 중반의 대학병원 B교수. 이 교수는 그동안 자신의 행동을 생각하면 가끔 소름이 끼친다. 환자만 오면 멋모르고 무조건 수술했던 자신을 돌아볼때 그렇다. 하지만 요즘들어 부쩍 의지가 나약해진 자신을 보면서 의사의 길에 처음 들어설때를 회고하면 부끄러워진다.

이 교수는 "사실 매우 위험한 환자가 오면 요즘은 혹 잘못됐을 경우를 염두에 둔다"고 솔직히 말했다. 주변에서 하도 많이 소송에 휩싸이고 환자 보호자들에 휘둘려 대는 것을 보면 남의 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대학병원에서 위험한 환자가 많은 흉부외과, 신경외과, 일반외과 전공의 지원이 급속히 줄고 있는 것이 이같은 세태의 반증이다. 이들과 호흡을 맞춰야 하는 마취과 지원자 급감은 이젠 뉴스거리도 안된다.

의사와 환자간 불신감 팽배 및 신뢰가 무너진 현실은 단적으로 소송 증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의약분업 파동 이후 의료사고 분쟁 해결 방법으로 의료기관 및 의사와 환자간 합의보다 민·형사상 소송이 급증하는 추세다.

'의사-환자'가 예전에는 소위 '라뽀'가 형성됐지만 이젠 문제가 생기면 대화와 합의보다는 생떼와 욕지거리 그리고는 돈과 소송으로 해결점을 찾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됐다.

경희의료원의 한 교수는 "예전에는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잘하면 됐지만 이제는 안된다"며 "특히 가족 말고 주변에서 이를 법적인 문제로 비화시키는 경우가 날로 늘고 있다"고 말했다.

복지부에 따르면 국·공립 대학병원을 비롯 대형 의료기관에서 의료사고 분쟁이 발생했을 때, 합의보다 민·형사 소송으로 해결하는 사례가 급속히 증가했다.

99년부터 올 6월말까지 43개 대학병원 등에서 발생한 의료사고 분쟁은 총 709건. 이중 99년에는 전체 의료사고 분쟁 266건중 병원과 환자측이 피해보상을 합의한 경우가 58%(154건)였다. 민·형사 소송 42%(112건)보다 높은 수치였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합의보다 민·형사 소송으로 가는 경우가 급증, 작년에는 298건중 54%(162건), 올해 6월까지 145건중 68%(98건)가 소송으로 진행, 합의 사례가 훨씬 줄어들고 있다.

환자나 보호자들이 이제는 예전처럼 의료사고에 대해 '좋은 게 좋은 식'이나 '의사에 대한 믿음'을 개의치 않고 손쉽게 법적인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이다.

여기에는 법조계의 의료사고에 대한 인식 변화와 전문 변호사 활동의 증대도 한 몫하지만 무엇보다 의사와 환자 및 보호자간 신뢰가 갈수록 허물어지고 있는 단면이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서울중앙병원의 한 교수는 "요즘은 소송 사례를 많이 듣다 보니 다른 것도 신경쓰지만 진료나 수술에 신경을 많이 쓸 수 밖에 없다"며 "이는 결국 연구나 교육 등 다른 분야의 부실을 초래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러면서 "일은 힘들고 그렇다고 어려운 것에 대한 보상이 따르는 것도 아니고 조금만 잘못되면 소송이니 뭐니 해서 인생 망칠 수 있는 상황서 환자와의 신뢰감 형성에 노력하기가 쉽지 않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 교수는 "요즘 친구들과 만나면 나중에 우리가 아프면 누구한테 몸을 맡겨야 하냐는 농담이 오고 간다"며 "진짜 남의 애기가 아닌데 해법은 찾기 힘들고 그저 안타까울 뿐이라"고 몹시 씁쓸해했다.
안순범기자 sbahn@daily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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