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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벽안의 노신사와 소아 환자들의 그림
[ 2002년 07월 16일 02시 57분 ]
지난주 파업이 50여일을 넘긴 경희의료원 로비에 물감을 잔뜩 묻힌 작업복 차림의 외국인 서너 명이 나타났다.

파란 눈과 금발만 아니라면, 페인트공으로 착각할 법도 한 이들은 마스크를 쓴 10여명의 어린이들과 함께 로비 벽면에 달라붙어 무언가 열심이다.

올해 9살인 소영(여·가명)이도 마스크를 쓴 채 연실 키득키득 웃으며, 열심히 붓질을 하고 있다.

무엇을 하는지 궁금한 할아버지 환자가 허리를 굽혀 벽면을 바라보니, 빨강·노랑·파랑 원색이 가득한 물고기·나무·바다 등으로 구성된 그림이 완성돼 가고 있다.

이달 초 한국을 방문해 여의도 성모병원·경희의료원·전남대병원 등지에서 소아환자와 함께 대형 조각그림·벽화 등을 그리고 있는 존 화이트(John Feight·62)씨는 미국 병원예술재단의 이사장이다.

설립 18년째를 맞고 있는 재단 소속 화가들은 전세계 병원들을 방문하며, 현재까지 165개국 500여 병원에서 2만점 이상의 그림을 환아들과 함께 직접 제작했다.

화이트 이사장이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아마추어 화가로 일하던 젊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림을 팔기 위해 파리에 도착한 그는 원하던 그림판매는 좌절됐다. 하지만 우연히 한 병원에서 중병을 앓고 있는 한 환아와 조우하며 평생의 직업을 찾게 된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나도 그림을 그리고 싶어" 중얼거리는 환아앞에서 그는 치료의지를 북돋울 수 있는 그림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게 됐고 이는 곧 재단설립으로 나아가게 된다.

화이트 이사장은 환아들과 그림을 그릴 때 영낙없는 개구쟁이 소년같다. 옷에 그림을 그려달라는 환아들에게 천역덕스럽게 "5달러…2달러"하며 협상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곧 활짝 웃으며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꽃·나비·물고기 등을 쓱쓱 그려준다.

12층 암병동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11살 주현(여·가명)이와 소영이 등 3명의 환아를 대동하고 행사에 참가한 한 보호자는 "오후 3시가 됐는데도 아이들이 배고픔도 잊은 채 그림에 열중하고 있다"며 "답답한 일상에 큰 활력소가 되는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 보호자는 "매일매일 힘겨운 치료를 받아야 했던 아이들이 너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병이 저절로 낫는 느낌"이라며 "휑한 병원 벽면에 우리 아이들이 그린 예쁜 그림들이 장식되는 모습을 보니 병원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지호기자 joyjh@daily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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