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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없는 국내 학술지와 글로벌화
[ 2007년 12월 25일 21시 50분 ]
국제적 위상과 국내 학술지의 ‘눈부신 도약’은 동시에 잡을 수 없는 두 마리 토끼인가. 양적인 증가에 따른 고공행진을 기대해봄직도 하지만 아직도 국내 학술지의 수준은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대부분 국내에서는 전문의 시험을 위한 논문 발표 수준에 그치고 있고 교수 승진을 위한 형식적인 논문 발표도 적지 않다. 학회들마다 세계화, 글로벌화를 외치고 있지만 정작 국내 학술지는 외면받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영문 논문이나 질 좋은 논문은 우선적으로 SCI 행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일부 학회 내에서는 투고 논문이 점점 줄어들고, 채우기에도 빡빡하다. 다소 질은 떨어지더라고 우선 ‘패스’하고 본다. 그래서 이중 게재나 중복 출판은 아직도 관행의 일부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편집자주]

양(量) 평가에 치우친 평가 시스템 문제

누가 저자가 되는지도 ‘뜨거운 감자’다. 대한신경외과학회 학술지편집위원장 이경석 교수(경희의대)는 “교수들의 연구 성과에 대해 질보다 발표된 논문의 숫자, 즉 양을 가지고 평가하다 보니 자기 이름을 남의 논문에 끼워 넣는데 열을 올리는 경우도 발생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임상 분야에서는 의사들이 연구보다는 임상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럼에도 이들에게조차 학술 논문 발표를 요구하다 보니 부작용이 종종 발생하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 논문을 썼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논문을 썼느냐’에 따라 교수가 평가되는 분위기에서, 교수들은 혼을 다해 양질의 논문을 써내기보다 다량의 논문을 생산해내기 위해 자기 표절의 유혹에도 빠지게 된다.

최근 과학기술부 주최로 서울 팔래스 호텔에서 열린 ‘과학기술계의 연구윤리 정립 노력 활성화를 위한 범 학회 심포지엄’에서 함창곡 교수가 발표한 연구 자료를 살펴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함창곡 교수는 “학술지 게재 논문의 저작권은 저자가 아니라 학술지 발행인에게 있으므로 논문 이중게재는 먼저 출판된 학술지의 저작권을 침해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연구 결과 조작 등의 ‘연구윤리’와 달리 이미 발표한 연구 결과를 새로운 내용인 양 다시 발표하고 먼저 게재된 학술지의 저작권을 침해하는 ‘출판 윤리’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문제는 심각해진다. 함창곡 교수는 또 “교수 업적을 주로 양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흔히 ‘동시투고’의 유혹을 받는데 학술지 심사기간에 따라 출판에 걸리는 시간이 달라 이중게재되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했다.

과거 연구 윤리가 잘 지켜지지 않은 이유를 양적 평가에 치우친 시스템 등 구조적인 원인에서도 꼽고 있는 것이다. 함창곡 교수는 “과거에는 학문적 풍토가 열악해 양적인 것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며 “일단 논문을 만들어야 해 윤리적인 측면이 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명색이 학회인데 1년에 두 번 정도 발행하는 논문집에 실을 ‘적당한’ 논문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니 중복논문, 표절 등의 논란이 이는 것이라는 얘기다. 교수 개인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이경석 교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엄청나게 창의적인 사람들이 아니다”며 “업적에 대한 부담이 있다 보니 유혹에 빠지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어떤 구조적인 원인이 있다기보다는 교수 개인의 부주의가 많았던 것”이라고 해석하는 목소리다.

끼워넣고 붙여넣기, “명백한 학술지 저작권 침해

자학회 및 세부학회의 학술지라면 논문 제출이 미진해 논문 투고를 강제적으로 독려하는 경우와 외부에 발표된 논문을 학회지에 다시 발표하는 사례도 많다. D대학병원 한 교수는 “선배 교수가 후배 교수에게 교육 홍보 차원에서 요청하면 거절하지 못하는 사례도 종종 발생한다”고 털어놨다. 이에 대해 함창곡 교수는 “중복 게재는 자기 표절에 해당한다. 자기가 이미 쓴 논문을 다시 실으면서 새로운 논문인 양 위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표절이 ‘도둑질’로 비유된다면, 자기 표절은 독자에 대한 ‘사기’로 비유된다. 하나의 논문을 두 편 이상으로 나눠 학술지에 중복 투고하는 ‘쪼개기’ 다른 사람의 논문과 뒤섞는 ‘짜깁기를 하면 원래 논문의 취지는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이와 관련, 함창곡 교수는 “연구자는 자기가 쓴 논문이더라도 연구를 진전시키지 않고 다시 게재할 경우 출처를 밝혀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보통 국내 학회지에 실은 논문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혹은 학문적으로 재평가 받으려고 권위 있는 등재 학술지에 다시 게재하기도 하는데 이때에는 ‘어디에 실렸던 내용’이라거나 ‘발췌한 내용’임을 각주로 표시해야 한다. 대한내과학회 편집이사 조경삼 교수(경희의대)는 “저작권은 해당 학술지에 있기 때문에 연구자들의 주의가 필요하며, 학교 및 학술지 편집인·심사위원들은 연구윤리에 대한 교육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연구윤리 실종, 회복 방안 없나

학술지의 질은 중요한 ‘잣대’다. 소위 SCI에 등재돼 있는 학술지들은 나름대로 논문에 대한 품질을 관리하고 있는데 소수의 국내 전문가에 의해 운영되는 이런 학술지들은 ‘투명성’과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꽤 있다. 따라서 해당 분야마다 학술지와 논문의 품질을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해 보다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의학 잡지의 양적인 증가에 상응하는 질적 향상과 의학 학술지의 체계화가 단연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우선 완벽한 개선을 이뤄내진 못했지만 관행과 불법ㆍ부정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했던 논문 진실성 문제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 점을 꼽을 수 있다. 연구 풍토도 많이 바뀌었다. 혹시 있을 지모를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논문 심사도 꼼꼼히 진행하고 있다.

조경삼 교수는 “학회지에 논문 게재를 요청하는 풍토가 많이 바뀌었다”며 “예전에는 2~3군데 신청해 놓고 한 곳에서 게재가 결정되면 다른 곳에 신청을 취소했지만 최근 편집자 실수로 중복 게재될 수 있어 처음부터 한 곳에만 게재요청을 한다”고 밝혔다. 오해가 생길 일은 아예 하지 말자는 분위기 때문이다. 조경삼 교수는 “연구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연구윤리가 정착돼가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논문 중복게재, 데이터 중복사용, 명예 공저자 등 관행이 광범위하게 뿌리내린 현실에 비춰 어디까지 손을 대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의 불씨는 남아있다. 일단 엄정한 잣대로 과거 관행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공감하는 목소리가 많다는 것은 희망적이다. “현재의 잣대로 엄격히 비판하는 것은 옳을 뿐 아니라 자정하자는 의미에서 비판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허선 교수는 “학자적 양심을 갖추도록 전공의 과정에서부터 연구윤리를 철저히 가르치고, 윤리 위반 사실이 적발된 사람에 대해선 일벌백계하는 게 옳은 방향”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또 연구윤리 부정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교수들의 각성, 명확한 연구윤리 강령 제정, 학회의 자정능력 강화를 제시했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해 대한의학학술인편집인위원회가 발족, 국내 의학학술지의 체계화와 게재 논문의 질적 향상을 위해 국내 의학학술지를 정기적으로 평가하고 이를 통해 나타난 문제점의 개선을 권장하고 있다.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널리 인용되는 권위있는 의학학술지를 발간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기에 의미가 깊다. 의편협 출판윤리위원회는 우선 '이중 게재'에 대한 판단기준을 마련하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각 학술지 편집위원장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도 기획하고 있다. 또 젊은 연구자의 교육 과정중 윤리성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저자실명제’를 지켜야 한다고 피력했다.

세부적으로는 국내 의학학술지 홈페이지 제작과 국내 의학학술지 현황 조사 및 평가기준을 설정할 예정이다. 의편협은 “모든 국내 의학학술지가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체계화를 성취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게재논문의 전산화 및 Korean Index Medicus 발간을 주관 하겠다”고 단언하고 “국내 의학 학술지의 Medline 및 SCI 등재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 하겠다”고 말했다.

[위 기사는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4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정숙경기자 jsk6931@daily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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