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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에 구멍 18개…기저귀하는 남편
[ 2008년 02월 22일 22시 29분 ]
필자가 지금까지 진료한 치루 환자 중에 가장 증상이 심했던 환자는 강원도 속초에서 수산물 사업을 하던 H사장이다. 1994년경 그가 처음 찾아왔을 때, 얼굴색이 어찌나 창백하던지 한 눈에 오랫동안 병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그의 나이 50세. 병을 앓기 시작한 것은 30대 중반부터라고 했다. 적어도 15년 이상 치루로 고생해온 셈이었다.
“어느 날 항문 옆에 조그만 종기가 나서 고약을 붙였지요. 며칠 만에 고름이 터졌는데 상처가 낫지 않고 계속해서 피고름이 나오는 겁니다. 병원에 가서 진찰해보니까 ‘치루’라고 하더군요. 치루는 수술해도 재발이 잘 되니까 그냥 참고 지내라고 해서 지금껏 참고 살았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잠시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물론 치루 수술은 다른 치질에 비해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당시에는 의료수준도 낙후되어 있었고, H사장을 진찰했던 의사가 항문병 전문지식이나 임상경험이 부족해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병의 원인이 명백한데도 환자에게 ‘참고 견디라’고 한 것은 너무 무책임한 처사였다.
함께 온 아내의 설명이 이어졌다. “처음엔 고름 나오는 구멍이 1개였는데 점차 구멍 수가 늘어서 지금은 18개나 되지 뭐예요? 기저귀가 없으면 외출을 할 수가 없어요. 사람 만나는 게 이 사람 일인데 불쾌한 냄새 때문에 사업도 제대로 못할 정도예요.”
조심스레 진찰해보니 환부는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항문샘 6군데가 곪아 치루를 만들었고, 제때 치료하지 않은 탓에 서로 가지를 뻗어 벌집처럼 정말 18개의 작은 구멍이 엉덩이에 나 있었다. 다행히 환자가 입원준비까지 해 온 상태여서 진찰 후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치루근본수술로 2시간 동안 수술한 끝에 18개의 고름구멍을 제거해냈다.
H사장은 수술 후 2주간 입원치료를 받았다. 치료받는 동안 그는 놀랍게도 한 번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극심한 치루의 고통을 견뎌온 그에게 수술 통증은 별 일이 아닌 것만 같았다. 수술 후 환자들이 호소하는 배변 고통에 대해서도 그는 ‘견딜 만하다’며 웃었다.
퇴원 후에는 월 1회씩 3개월간 통원치료를 받았다. 매번 아내와 함께 다녀갔는데 “서울에서 속초까지 왕복 8시간을 아내와 데이트하는 기분으로 옵니다. 정말 날아갈 것 같습니다”라며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3개월 후 모든 진료가 끝났다고 하자, 그는 “원장님을 이제 못 봐서 어쩌죠?”라며 진심으로 섭섭해했다. 필자 역시 오랜 투병을 끝내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더 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인상적인 환자였다.
치루는 결핵, 궤양성 대장염, 치열, 크론병, 항문암 등이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별다른 원인 없이 발병한다. 처음엔 뾰루지나 종기 정도로 착각, 연고나 항생제 등으로 치료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항문샘의 감염이 원인인 경우가 많으므로 외과적 수술로 제거하는 것이 최선이며, 치료 없이 방치하면 대부분 만성치루로 진행된다.
만성 치루의 불편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항문 주변 위생은 말할 것도 없고, 냄새와 불쾌감이 심해 정상적인 부부생활도 어려울 정도가 된다. 치질 중에서도 치루는 반드시 조기에 치료해야 하는 병이다. 오래 방치할 경우 항문암으로 발전하거나 괄약근 손상을 유발해 항문기능을 아예 상실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변은 부드러운데 배변 직전 따끔거리거나 무지근한 통증이 느껴지는 경우, 혹은 항문 주변이 전체적으로 부은 듯하고 유난히 열감이 느껴지는 일이 반복되면 한번쯤 치루를 의심해보고 병원을 찾는 것이 좋다.
헬스조선 webmaster@healt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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