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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의사와 바이올린 이야기
[ 2009년 03월 31일 21시 58분 ]
그는 기러기다. 삼성서울병원 교수 시절 안식년 동안 머물렀던 캐나다에 아내와 두 아들을 남겨두고 홀로 귀국한지 벌써 6년이다. 처음에는 아이들에게 영어나 가르칠 요량이었다. 하지만 한 두해가 지나면서 아이들이 욕심을 내기 시작했고 꼼짝없이 기러기 아빠의 길을 걷게 됐다. 가슴 저미게 보고 싶었고 몸서리 치도록 외로웠다. 늦은 밤 불꺼진 집에 들어가기도 싫었고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라는 자문도 수 없이 했다. 그 날도 어김없이 알코올 기운 그윽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와 소파에 몸을 맡겼다. 아이들 생각이 명치 끝부터 밀려왔다. 그러다 문득 아(我)의 유년기 회상에 빠져들었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소중한 보물 하나를 발견했다. 레알성형외과 하범준 원장의 바이올린 교본 스즈키와의 재회는 그렇게 시작됐다.
내게는 너무 소중한 바이올린
그가 바이올린을 처음 접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다. 부모님의 권유로 시작했지만 바이올린의 매력은 의대 시절까지도 바이올린 활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활을 켜는 강도와 속도에 따라 천차만별의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은 사춘기 소년의 복잡다난한 감정을 표현하고 절제시키는데 제격이었다.
우울하거나 슬플 때도, 기쁘거나 신이 날 때도, 화나거나 힘겨울 때도 바이올린은 늘 그의 감정과 함께 했다.
“바이올린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내 감정을 달래주고, 내 기분을 맞춰주는 너무나 기특하고, 너무나 소중한 친구였다”
하지만 바늘 하나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뻑뻑한 의대 본과 생활은 더 이상 그에게 바이올린을 허락치 않았다.
책에 묻혀 살았고 연일 계속되는 시험을 치르며 바이올린은 서서히 그의 관심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녹록찮은 재회
그랬다. 20대 초반 이후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볼 나이가 다 되도록 그는 바이올린 활을 잡지 않았다.
그러던 그에게 다시 한번 바이올린이 운명처럼 다가왔다. 기러기 아빠의 외로움이 정점에 달했을 즈음 유년기 시절 켜던 바이올린의 슬픈 선율이 떠올랐고 그 날로 바이올린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20년이 넘는 세월 속에 손은 굳을 대로 굳어 있었고 보윙(bowing 바이올린 활 쓰는 법) 감각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 때는 무언가에 몰두하지 않으면 더 힘들어질 것 같아 두려웠다. 처음 시작한다는 각오로 바이올린 입문서인 스즈키 1권부터 다시 시작했다”
아무리 바빠도 연습을 거르지 않았다. 레슨도 받았다. 심지어 개원 원장의 특권(?)으로 환자가 없는 사이사이 바이올린을 잡았다.
생뚱맞은 바이올린 소리에 어리둥절 하던 환자도 적잖았다. 하지만 호응은 나쁘지 않았다. 대부분의 환자가 길어지는 대기시간을 감수하며 연주를 감상했다.
다시 찾은 선율
가장 난관이었던 비브라토(vibrato, 바이올린 소리를 떨리게 하는 기교)를 극복해 내면서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스즈키 10권을 단숨에 끝냈다. 예전의 열정과 감각이 되살아 났다. 바이올린 소리도 유년기 시절, 아니 그 이상이었다.
가족을 그리며 활을 켰고 바이올린 선율은 기러기 아빠의 외로움을 아는 듯 구슬프게 흘러 나왔다.
방학 시즌 아이들을 볼 생각에 설레이는 마음도 바이올린에 실었다. 병원 일이 고되면 고된대로, 신이나면 신나는대로 바이올린으로 표현을 해냈다.
자신의 감정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바이올린은 오랜 기러기 아빠 생활로 지쳐 있던 그에게 중요한 마인드 컨트롤 수단이었다.
“바이올린은 참 미묘한 매력을 지닌 악기다. 같은 음정을 가지고도 수 천개의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가 바로 바이올린이다. 그래서 좋다”
기러기 아빠는 더 이상 외로움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그리움에 힘겨워 하지도 않았다. 바이올린은 그에게 다시금 마음의 안식을 주고 있었다.
고맙다, 아들아!
가족의 그리움을 바이올린으로 달래던 그에게 희소식이 전해졌다. 첫째 아이가 미국 아이비리그인 브라운대학에, 그것도 PLME에 당당히 합격했다는 것.
PLME는 ‘Program in Liberal Medical Education’의 약자로, 고등학생들이 브라운 대학에 원서를 넣는 동시에 지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대학 4년, 의대 4년을 포함해 총 8년 프로그램으로, 졸업과 동시에 의사가 된다. 의사가 되고 싶은 학생에게는 꿈같은 기회로 통한다.
그것도 아이비리그중 하나인 브라운대학에서 받는 학위를 감안하면 그 인기와 경쟁률을 과히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게 어렵다는 브라운대학에 입학한 것도 기특한데 ‘하늘의 별 따기’라는 PLME까지 통과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기러기 생활 6년을 한 순간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아버지도 못한 브라운 PLME에 합격한 것도, 아버지와 같은 의사의 길을 택한 것도 모두 고마웠다”
“아버지는 성형외과 전문의지만 아들은 흉부외과를 전공할 계획이다. 어려운 길임을 너무나 잘 알지만 본인의 뜻을 존중해 줄 생각이다”
성공한 기러기 아빠
그는 ‘성공한 기러기 아빠’라고 망설임 없이 자평했다. 그리고 예비 기러기와 현재 기러기 아빠들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를 남겼다.
“홀로 남겨진 삶은 상상 이상으로 힘들다. 때문에 그릇된 방식으로 힘겨움을 이겨내려는 아빠들이 적잖다.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몰두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자신이 좋아하고 평생 즐길 수 있는 나만의 것을 가져야 한다. 나는 바이올린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기러기 생활을 시작하고 수 개월을 술로 생활하며 건강에 적신호까지 켜진 바 있는 그이기에 돌파구 찾기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그는 또한 적당한 걱정도 좋지만 그 보다는 아이들을 믿고 지켜봐야 한다는 점을 피력했다.
“아이들 스스로 잘 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 지나친 간섭은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나 역시 초기에는 아이들의 탈선과 부적응 등 하루에도 수 십번씩 걱정했다. 하지만 아이들 스스로 잘해줬고 교육 시스템도 믿을 만 했다”
하범준 원장은 큰 아들의 대학 입학을 기점으로 얼마전 아내를 불러들여 기러기 생활을 청산했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9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박대진기자 djpark@daily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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