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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결정' 의사에서 환자에게로 넘어가
[ 2009년 05월 21일 21시 55분 ]
법이 변화된 사회현실 곁으로 성큼 다가섰다. 국민여론이 존엄사 찬성으로 기운 가운데 대법원이 존엄사를 허용하는 판결을 내놨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대법원장 이용훈)는 21일 환자 김모(76·여)씨 측이 세브란스병원 운영자인 연세대학교를 상대로 낸 ‘무의미한연명치료장치제거등’ 청구소송에서 피고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확정 판결을 내렸다.

이에 승소한 환자측 신현호 변호사(경실련 보건의료정책위원)는 “의료결정권이 의사에서 환자로 넘어간 것”이라며 “환자의 주체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한 매우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병원, 패소지만 승소…구체적 지침과 판단권리 얻어

이번 소송은 피고 병원측에도 큰 수확을 안겼다. 패소이지만 승소인 셈이다. 병원측 박형욱 변호사는 “의료기관의 소송 목적은 승소와 더불어 의료혼란을 막을 절차기준을 마련해달라는 것이었다”면서 “소송에서는 졌지만 연명치료에 관한 기준을 제시받았으니 절반의 승리인 셈”이라고 말했다.

세브란스병원의 이번 소송 덕분에 의료계는 더 많은 것을 얻게 됐다. 서울대병원이 지난 18일 밝혔듯 암암리에 계속되어온 말기환자에 대한 연명치료중단이란 불법행위가 이제는 합법화될 전망이다. 또한 대법원은 연명치료 중단여부 판단에 대한 병원의 재량권도 인정해줬다.

이에 박형욱 변호사는 “의료계로서는 영향력이 큰 판결이었다”며 “앞으로는 이번 판결에서 언급된 병원윤리위원회와 사전의료지시서를 어떻게 체계화시킬지가 과제로 남았다”고 분석했다.

대법원은 이날 원심확정 판결에서 연명치료 중단을 허용하는 기준에 대해 △환자의 상태가 회복 불가능하고 △짧은 기간 내 사망이 명백하고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의사가 객관적으로 추정 가능할 때라고 제시했다. 또 △이 같은 판단은 전문의로 구성된 병원윤리위원회 등이 맡아야 한다고 했다.

판결, 일반적 효력 없지만 지침 충족하면 큰 문제 없을듯

이러한 법원 판결은 그러나 개별사건에 대한 구체적 판단일뿐 사실상 일반적인 효력은 없다.

대법원 공개변론에서 참고인으로 출석, 대법관들의 질문공세를 받았던 단국대 법대 이석배 교수는 “대법원 판결은 당해사건에 대해서만 법적 구속력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이어 “더구나 이 사건 판결은 대법원전원합의체에서도 13명 전원의견이 아닌 반대가 있는 9명 다수의견이기 때문에 이 사건 환자와 상태가 다른 환자의 사건에는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이번 대법원 판결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석배 교수는 “이 사건이 다른 사건에 대한 구속력은 없지만, 대법원이 제시한 지침 안에 충족되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가령 서울대병원이 말한 치료중단은 본인이 의사를 밝힌 말기암환자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 교수는 이 지침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아직 판결문을 안 봐서 모르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가 회복 불가능한 상태이고 짧은 기간 내 사망이 명백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기준이 불분명하다”고 말했다.

또한 대법원 공개변론에서도 가장 활발히 논의된 ‘의사(意思)를 밝힐 수 없는 환자의 의사를 어떻게 추정할 것인가’란 문제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대법원은 객관적 자료가 되는 사전의료지시서 없이도 추정적 의사를 인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는 이 사건 환자 김모씨처럼 일상생활을 통해 가족과 친구 등에게 한 의사표현, 타인에 대한 치료를 보고 환자가 보인 반응 등을 고려해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이석배 교수는 “우리나라처럼 가족의 의사가 중시되는 사회에서 과연 병원윤리위원회가 보호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의문”이라며 “특히 대법원이 밝힌 ‘가족의 동의’가 결정적 역할이 된다면 주치의가 환자의 의견이 아닌 가족의 의견에 휘둘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문제에 대해 환자측 신현호 변호사는 “논란이 있어야 사회가 발전한다. 사전의사지시서를 미리 써놔도 막상 닥쳤을 때는 의견이 바뀌기 마련”이라며 “문서화됐다고 해서 다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대법원 판결 뒤에도 계속되는 논란…입법화 필요

이처럼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고 해도 논란이 계속되는 것은 법적 효력을 갖는 지침이 없기 때문이다.

이석배 교수는 “대한의사협회가 대법원과 학계 등 대다수 사람들이 공감하고 인정하는 지침을 만들어야 하지 않나 싶다”면서 “지금 병원들이 개별적으로 지침을 만들고 있지만 이로는 약하다. 의협이 대법원 판결보다 엄격하게 지침을 제시해야 한다”고 했다.

이 지침이 법적 효력을 가지려면 입법화 과정이 필요하다. 관계자들은 벌써 오랫동안 존엄사 관련 법률을 조속히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지난 2월 국회에 존엄사법을 대표발의하고 3월 입법공청회를 연 바 있는 신상진 의원(한나라당)은 “존엄사 관련 제도의 틀을 만드는 논의를 본격화하는 게 시급하다”면서 “논의는 시급하게 하되, 시행은 사회적 합의가 충분히 이뤄졌을 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상진 의원은 “발의된 법안이 6월 상임위원회나 정기국회에서 심사돼 올해 안으로 통과된다면, 이르면 내년 하반기쯤 본격 시행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고 예상했다. 다만 이에 앞서 각 질환마다의 구체적 지침을 만드는 일 등이 먼저 시행돼야 한다고 했다.
이주연기자 gold@daily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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