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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백혈병史 새로 쓴 시인 김춘추 교수
[ 2009년 06월 21일 21시 55분 ]
"김춘추 교수를 작은 거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 이상의 무엇이다."
지난 19일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혈액내과 김춘추 교수 '정년기념 시집 출판기념회'에서 만난 그의 한 지인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국내 백혈병 역사를 새로 쓴 김 교수를 향한 그의 믿음은 깊고 확고해 보였다.
지난 1983년 국내 최초로 동종조혈모세포이식에 성공하면서 '백혈병은 곧 죽음'이라는 공식을 깨트린 김춘추 교수가 오는 8월 은퇴를 앞두고 있다. 그는 연간 250여 건 이상의 이식을 시행해 한국 백혈병 치료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날 행사는 김 교수가 백혈병 치료를 시작한 이후 경험한 환희와 절망의 기억을 환자와 후학들이 공유하는 자리였다. 행사는 시종일관 유쾌하고도 엄숙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김 교수는 테이블을 일일이 돌며 악수를 하고 와인을 따랐다.
이어 고등학교 시절 학업을 같이했던 음악대학 한 교수가 김 교수를 떠올리며 작사·작곡한 곡을 바쳤고, 후학과 환자들이 만든 동영상이 방영됐다.
지인들이 떠올린 김춘추 교수는 열정과 겸손함 그리고 환자를 향한 애틋함으로 요약된다.
"대단한 의학자다. 집착하면 옆이 누군지도 모를 정도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고집스러웠다.(서울의대 김동집 명예교수)"
"멋진 사람이다. 남들이 안 하는 분야를 개척해 80년대 초 백혈병 치료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의 열정을 후배들이 많이 배울 것이다.(고려대 김원일 명예교수)
의학계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고(성모병원 김학기 교수), 병마와 영혼을 치료하는 명의(김형영 시인, 환자)라는 찬사가 이어졌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환자는 "김 교수는 자신을 병을 낫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이고 했다. 당신이 살려고 하면 살고 죽으려 한다면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통해 용기를 얻었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형이다"라고 고 마음 표했다.
김 교수가 시를 쓰면서 사귄 한 시인은 그를 "한 시간의 영화보다 더 큰 감동을 주는 핵"이라고 했다. 동영상을 보던 김 교수의 눈빛이 떨리는 듯했다.
동영상 방영이 끝나고 사회자가 김 교수의 약력을 간단히 소개했다. 이어 김 교수가 연단에 올라 떨리는 목소리로 화답했다.
"눈물겹다.(떨리는 목소리로) 내 식구를 내 옆에 지금까지 고생해준 가족, 그리고 이 자리를 마련해준 모든 분에게 감사드린다. (그동안)욕도 많이 먹고 (주의에)사람도 많았다. 김학기 교수와 이종욱 교수 등 일어나 달라. 제가 올챙이임을 잊지 않도록 노력해준 분들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형수님까지도."
그는 마지막으로 "오늘 이 자리가 인생을 위한 인생의 밤이 됐으면 좋겠다"며 참석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행사가 끝나고 김 교수는 참석자 모두와 악수를 했다. 그는 "행사 끝나고 흠뻑 취하고 싶다"고 했다.
의사이자 시인 그리고 눈물 많은 독재자
나
천사되어 날아갈래
이 앤, 너
무거워서 떨어져
그럼 구름 언저리쯤만
날아갔다 깊은 산
안개 속에 떨어지지 뭐
그 후, 소년은 떠나면 엽서 한 장
없는 텅 빈 하늘로 날아가고
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曲線으로 내리는 눈송이처럼
휘청거리고 있다 휘청거리고 있다
<천사> 전문
김춘추 교수는 의료진의 감수성을 유난히 강조한 의학자다. 의사의 부족한 부분을 사랑과 예술로 채워 창조적 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천사'라는 시는 죽음을 맞이한 소년을 기억하며 그 비참함을 한 잔 술에 기대어 쏟아낸 아픈 기억이다.
그는 그동안 요세병동, 하늘목장, 얼음 울음, 산 속의 섬, 어린 순례자 등의 시집을 펴냈다. 정년을 기념한 시집은 ‘등대, 나 홀로 짐승이어라’이다. 그는 시집 머리글에 “시집도 아니고 시선집은 더더욱 아닌 이 가여운 소출을 2009년 정년퇴임을 맞아 저의 ‘시 묶음’이라 부르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김 교수는 명의라 불리는 이들이 그러하듯 환자 사랑이 유난히 남달랐다. 젊은 시절 환자에게 수혈할 피가 모자라면 어김없이 자신의 팔부터 내밀었다. 환자가 죽음을 맞이하면 연구실 문을 잠그고 홀로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그는 환자의 죽음을 술과 시로 달랬다. 그러다 보니 환자와 후학들에게 카리스마적인 인물로 보였지만 반대론 일방주의적이라는 오해를 받곤 했다.
그는 지난 2007년 EBS 명의라는 의학프로그램에서 "백혈병 환자 이식에 관해서 만큼은 독재자가 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후학들에게는 "산 환자는 기억하지 말고 죽은 환자를 기억하라"고 가르쳤다. 그는 얼마 전 기자에게 지그시 눈을 감으며 "사재를 털어 백혈병을 연구했고, 한국 의료수준이 아시아 최고로 올라섰다. 의료의 중심은 환자여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1978년 충북 옥천의 한 병원에서 사비를 들여 마련한 개 100여 마리를 통해 오늘의 연구성과를 이뤄냈다. 지난 1980년대 0%에 가까웠던 백혈병 완치율을 70%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그런 그가 올해 상반기 BMT 병실 논란이 불거진 후 "참담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학창시절 의학도보단 문학도에 가까웠다고 한다. 취미도 낚시 정도가 유일하다. 그를 시에 눈 돌리게 한 것도 조혈모세포 이식을 위해 희생한 100여 마리의 개를 위로하는 마음이었다고 김 교수는 고백한다. 김춘추 교수는 이제 곧 병실을 떠나 제2의 의사 인생을 살아갈 예정이다. 돌아오는 길에 그가 건넨 시집이 유난히 묵직했다.
음상준기자 esj1147@daily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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