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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바람을 그리는 정신과 의사
[ 2009년 09월 01일 03시 10분 ]
10년 전 처음 히말라야를 보았다.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웅장한 산봉우리와 그 위로 끝없이 펼쳐진 눈부신 하늘 …

대자연의 침묵이 깃든 거대한 설봉을 오르며 나는 한없이 작아졌고, 일상의 묵은 각질과 오랜 시간 쌓여온 오만의 때가 씻겨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2008년 11월 ‘작가노트’ 이홍식

지난해 11월 강남세브란스 정신과 이홍식[사진] 교수는 ‘히말라야’라는 제목의 첫 유화 개인전을 열었다.

연세대 의예과 시절 유화 몇 점으로 작은 전시회를 연 이후 40여년 만이었다. 이제는 한 점만 남은 1969년 추억의 그림들을 떠올리며 그는 “히말라야 설산에의 환영 같은 그리움”에 붓을 들었다.

31일 데일리메디와 만난 자리에서 이 교수는 모두 네 차례 그곳을 방문했다고 했다. 그는 “트레킹 코스를 따라 베이스캠프까지 걸었을 뿐”이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하루 대여섯 시간은 족히 되는 거리였다.

이 교수는 히말라야를 “거대한 우주의 실체를 가늠케 해준 곳” “잿빛 도시에 지칠 때마다 그리운 곳”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그곳의 새벽하늘에서 울트라마린블루의 짙은 색을 건져 올렸고 그곳 사람들의 눈망울에 선연한 별빛을 고스란히 화폭에 담았다.

“처음 붓을 든 게 1969년 의예과에 입학한 무렵이에요. 박정희 정권의 계엄령과 데모로 거리가 시끄러울 때였는데 우연히 그림 동아리 ‘화우회’ 벽보를 보게 됐어요.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어 인연을 맺었죠."

“덧칠을 하며 풍성해지는” 유화의 맛도 좋았다. 뺄셈이 아닌 덧셈의 미학. 이 교수는 “캔버스 앞에서 무한한 자유로움을 느꼈고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했다.

의사의 길을 걸으며 한참 동안 붓을 놓았던 그는 1997년 미국 시카고 일리노이대에서 의과 연수를 받으며 다시 그림과 조우했다.

낯선 하숙집의 지하 단칸방에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완의 해방감”이 다시금 이 교수를 엄습했다. 하숙집에 함께 묵었던 인디언 화가의 말동무를 하며 그림 기법도 전수받았다. 이번에는 붓을 내려놓지 않겠다고 그는 다짐했다.

이후 이 교수가 세상의 ‘산’과 ‘길’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면서 그의 화폭은 한층 풍성해졌다. 히말라야와 산티아고의 길, 얼마 전 이탈리아 알프스 끝자락의 돌로미티까지.

이 교수는 “최근 산티아고의 800km 순례길을 담은 두 번째 연작을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의 화실 곳곳에는 히말라야 연작보다 온화한 색감의 캔버스들이 하나 둘 씩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길이 끝없이 이어져 아직 갈 길이 남아있다는 게 마음을 편하게 해요. 궁금증이랄까 새로운 희망이랄까. 오래 걸으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느낌이잖아요? 항아리에 새물을 담으려면 고인 물을 빼야 하듯이 깊은 곳에 응어리진 뭔가를 툭 빼놓고 오고 싶은 기분이에요, 언제나.”

이 교수는 붉게 타오르는 돌로미티의 사진을 보여주며 “의사로서 긴장된 시간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이완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순간 그의 눈이 사진 너머 돌로미티의 추억을 응시하는 듯 보였다.

몸보다 마음이 본질이라는 이유로 정신과를 선택했다는 이 교수. 도심 한복판의 교수실에서 돌로미티와 산티아고, 히말라야의 바람을 느끼는 그야말로 이 병든 시대의 건강한 보헤미안이 아닌가.


▲ 이 교수가 최근 지인들과 트레킹을 다녀온 이탈리아 알프스 돌로미티
나원정기자 wonjeong@daily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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