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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규 교수와 민병철 前 서울아산병원장
[ 2010년 04월 01일 21시 30분 ]
‘청출어람(靑出於藍)’. ‘푸른색은 쪽(藍)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다’라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더 나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푸른색이 쪽빛보다 푸르듯이, 얼음이 물보다 차듯이 면학을 계속하면 스승을 능가하는 학문의 깊이를 가진 제자도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다. 의학처럼 이 말이 어울리는 학문이 또 있을까 싶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의학에서 교수, 선배의 교육은 절대적이지만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그 수준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어떤 교수, 어떤 선배를 만났는지는 개인 삶의 방향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 이 같이 자신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을 우리는 흔히 ‘멘토’라고 부른다. 멘토의 유무가 성공을 좌우한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데일리메디는 서울아산병원 외과 이승규 교수가 성공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준 민병철 전 서울아산병원장과의 관계를 보면서 이를 짚어봤다.[편집자주]

“간(肝) 분야에 뛰어들게 된 결정적 영향 주신 분”
세계 최고 간이식 드림팀을 이끌고 있는 서울아산병원 외과 이승규 교수의 멘토는 민병철 전 서울아산병원장이다. 지금의 위치에 있기까지 민병철 전 원장의 공을 잊지 않는다. 이승규 교수는 세계최고 칼잡이 명성에 걸맞게 지난 1992년 8월 뇌사자 간이식을 성공했으며, 그 후 동시에 두 명의 생체로부터 간을 받아 한 명에게 이식하는 생체간이식 수술을 성공했다.

미국 ABC 방송은 이승규 교수팀을 ‘한국의 드림팀’이라고 명명하고,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간이식 수술이 뇌사자 장기로 이루어지는 반면 한국은 대부분의 경우 살아 있는 사람으로부터 떼어낸 간을 환자에게 이식하는 생체간이식이 이뤄진다. 더욱 놀라운 것은 수술 성공률이 96%에 달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공률”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세계간암학회 파리대학 자크 베르지티 교수는 “한국은 간암에 대한 외과수술은 물론 방사선 및 항암치료 등 비외과적 치료 부문에서도 혁신을 이뤘으며, 이 분야의 세계적인 리더그룹의 대표주자는 이승규 교수다. 특히 생체간이식 분야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서양의사들이 기술을 배워가고 있는 정도”라고 극찬했다.

이런 간이식 대가 이승규 교수가 처음부터 간 분야를 염두해 뒀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바로 민병철 원장의 조언으로 지금의 이승규 교수가 탄생하게 된 스토리가 숨어있다. 그는 간 보다 대장항문외과를 전공하고 싶어했다. 그 시절 수술 기술이 낙후돼 한 번 수술에 들어가면 몇 시간은 기본이었다. 이 교수는 오래 서 있는 것이 너무 힘들어 빨리 수술이 끝나는 분야, 바로 수술 시간이 짧은 대장항문이 좋아보였다고 했다. 목표를 대장항문 외과의사로 잡은 이 교수는 1985년말 미국 클리블랜드 클리닉에 지원해 연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민병철 원장의 호출이 있었다.

민 원장은 “남들과 다른 길을 가도록 해라. 미국에 가서 간이식 기술을 배워봐”란 조언을 이 교수에게 한 것이다. 오랫동안 품은 꿈이 물거품이 된 순간이며,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 교수는 “간 분야는 전혀 생각이 없었고, 외과의사로서 ‘미지의 세계’였기 때문에 그 후 여러 생각을 했다”고 회고했다.

세계 최초 간이식은 1963년 미국의 스타즐 박사에 의해 시도됐지만, ‘시도’에 그쳤고, 1967년 최초 간이식에 성공,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권에서는 간질환 환자가 많았지만 뇌사자 장기기증이 거의 전무했으며, 미국 등으로 건너가 간이식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무용담처럼 알려질 정도였다. 이승규 교수는 “간 파트는 거의 불모지와 마찬가지였다. 미개척 분야로 민병철 원장님이 평소 관심을 갖고 계셨던 것을 나에게 배워보라고 권해주신 것 같다”며 “당시 만해도 간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대장항문보다 간이식을 전공해야 내가 의료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고 했다. 특히, 그 시점에서 일생일대의 또 다른 멘토 ‘마사토시 마구치’ 교수의 논문을 본 것도 결정적이었다. 이 교수는 “간 절제 관련 내용의 마구치 박사 논문을 보고 ‘나도 이런 수술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며 “간암, 간이식 수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결국 이승규 교수는 “어려운 것, 힘든 것,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민 원장님의 조언 70%와 나의 여러 생각들 30%, 그리고 마구치 교수의 논문 등 여러 가지를 통해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민병철 전 원장에게 배운 외과 테크닉
그는 민 원장에게 특히, 외과 술기의 큰 테크닉들을 많이 배웠다. 이 교수는 전공의 과정을 모두 마치고, 남들은 개업을 해서 ‘원장님’ 소리를 들을 나이에 눈물콧물 쏙 빼며 전공의 과정을 또 다시 거치며 호되게 술기를 익혔다.

바로 민 원장이 개업한 청계천에 위치한 신영병원에서 5년 동안 ‘전공의’가 돼 같은 과정을 반복한 것이다. 이 교수는 ‘외과의사 이승규’ 자서전에서 “평소 온화하신 분인데 수술실에서 만큼은 서릿발 같으셨다”며 “야단도 엄청나게 많이 맞고 욕도 실컷 얻어먹고, 심지어 민 원장님께 혼나는 악몽을 꾸다가 깨어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이 같은 과정은 그에게 독(毒)이 아닌 약(藥)으로 작용했다. 오히려 ‘온 힘을 다해 열정과 노력으로 스스로를 단련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은’ 계기가 된 것이다. 그렇게 힘든 생활 동안 이 교수는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었으며, 수술실에서의 불호령도 3년만에 조용해질 수 있었다.

이 교수는 “내가 생각해도 손놀림이 많이 좋아졌고, 그 때는 욕 대신에 칭찬을 받기도 했다”며 “그 이후부터는 많은 수술을 내게 맡기셨다”고 말했다. 힘든 수련 과정을 거쳐 지금의 간이식 수술의 대가로 탄생하기까지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아산병원 개원 멤버로 이미 낙점됐었다, 왜?
그는 간 분야를 전공하게 된 것에 대해 “지금 생각해보면 민 원장은 이미 서울아산병원 개원 준비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간 분야로 저를 데리고 가려고 이미 염두해 놓고 계셨던 것 같았다”며 “당시는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민 원장은 당시 서울아산병원 개원 준비 멤버로 활동하고 있었고, 특히 장기이식 분야를 장려하기 위한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렇게 민 원장의 큰 그림 속에 이 교수는 이미 간이식 분야 전문의로 낙점된 것이다.

간 이식수술은 다른 어느 수술보다 어렵다. 수술 위험도나 부담은 출혈량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는데, 무려 20~25병의 수혈이 필요, 병든 간을 떼어내는 일은 그만큼 힘들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조금만 잘못 매스를 그어도 혈액이 간에서 스며나와 당황스럽게 할뿐만 아니라 그 근원지가 어딘지 알아내기도 힘들다는 것.

이처럼 힘든 분야에 민 원장이 이승규 교수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이유는 그의 열정과 성실성, 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민 원장의 자서전 ‘나는 대한민국 외과의사다(2006)’에서 그는 이승규 교수에 대해 “이승규 교수는 1978년 서울대 의대 레지던트를 마친 뒤, 신영병원에서 나와 함께 외과의사의 길을 걸었다”며 “그는 고대 구로병원과 아산병원은 물론 현재까지 거의 30여년을 나와 함께하고 있다. 우직하고 고집도 세지만 바로 그 때문에 이러한 업적도 이뤄낼 수 있었다”고 기술했다.

이승규 교수는 “다른 분야는 모르겠지만 외과, 특히 간이식 수술이 숙련되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걸린다. 집중적으로 트레이닝 받았을 경우에 거의 7~8년은 걸린다”며 “자기 나름대로의 집념, 열정, 욕심, 체력이 뒷받침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더불어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도 그는 “미개척 분야, 남들과 다른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의학은 계속 발전되는 것으로서 한 고비씩 해결 되더라도 또 다른 도전들이 있다”며 “아직도 미해결된 분야가 많다. 도전과 열정을 갖고 노력하면 성공에 다가갈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그때의 상황이 하늘의 뜻이라고 말한다. 모든 일들이 ‘딱’ 맞아 떨어져 그 경험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됐다는 얘기다. 이승규 교수는 “인간이 뜻대로 되는 것은 없다. 상황이 하늘의 뜻대로 잘 맞아 떨어졌고, 그런 점에 있어 나는 운이 좋은 것 같다.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민병철 前 서울아산병원장
민병철 전 서울아산병원장은 1929년 경성부 소격동(現 서울 종로)에서 출생했다. 진주 제일 소학교를 졸업한 뒤,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 진주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경성대학교 예과에 입학한 후 서울대 의과대학 본과에 진학, 졸업과 동시에 해군에 입대, 중위로 예편했다. 곧바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국 보스턴 터프츠 대학교 인턴, 레지던트, 치프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 의대 전임강사로 재직했다.

그는 미국 외과전문의 한국인 1호 의사로 백병원에서 잠시 근무했다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교실 조교수와 부교수를 거쳐 정교수직을 역임했다. 민 원장은 그 사이 신영병원을 개원하기도 했고, 고대 구로병원 초대원장, 서울중앙병원(현 서울아산병원) 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학술활동도 활발했다. 미국 외과학회 정회원인 그는 대한소화기병학회 회장, 대한외과학회 회장, 고대 구로병원 초대원장, 서울중앙병원(현 서울아산병원) 원장을 역임했다. 상훈으로는 국민훈장모란장, 대한민국기업문화상, 한국능률협회 최고경영자상을 수상했다.

박건춘 서울아산의료원장은 민 원장 저서 서평에서 “아산병원은 민병철 전 원장께 많은 빚을 졌다. 우리 병원은 그가 흘린 땀과 노력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다. 그는 바쁜 중에서도 수많은 의학도와 후배 의료진을 가르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 결과 후배 제자들이 이제 한국 의학계를 끌고 가는 견인차가 됐다”고 밝혔다.

데일리메디는 그와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현재 미국 하와이에 장기 체류 중이어서 아쉽게 성사되지 못했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봄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노은지기자 nej331@daily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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