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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 넘어 요리경쟁 돌입한 대학병원
[ 2010년 10월 15일 03시 07분 ]
지난 7월 21일 오전 강남세브란스 암전문병원 내 영양상담실. 첫 번째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식단 모형을 두고 환자와 대화하는 영양상담사의 모습이 보인다. 여느 병원 상담실과 다를 것 없는 광경이지만, 상담실 안에 자리한 두 번째 문을 여는 순간부터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진다.

“여러분, 수술 받고 음식 가려 드시느라 많이 불편하시죠? 오늘 잘 배워 가면 회복하는데 많은 도움 되실 거예요.”

이날의 주제는 갑상선 암환자를 위한 요오드 제한식. 강사 앞 조리대는 물론 네 개의 테이블에 고르게 분배된 잘 다듬어진 두부, 쇠고기 우둔살, 대파, 부추 등의 재료가 식감을 돌게 한다.

테이블 당 참가자는 3명. 두건과 앞치마 복장을 깔끔히 갖췄다. 앞서 나눠준 매뉴얼을 보니 쇠고기 두부 부추볶음과 오이 물김치를 만드는 법이 나와 있다.

강의를 맡고 있는 최은정 교수(신흥대학 조리학과)는 “흔히 암에 걸리면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쇠고기가 들어간 메뉴로 정했다”면서 “담당교수의 제안으로 일부러 넣은 것”이라고 말했다.

환자·보호자 직접 요리하는 강좌 등 개설

그의 뒤 칠판에 ‘YOU ARE WHAT YOU EAT!(내가 먹은 음식이 나입니다)’이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환자가 직접 요리를 배우고 맛볼 수 있게 하는 강남세브란스병원의 ‘메디컬 쿠킹클래스’가 진행되는 풍경이다.

메뉴에 따라 다르지만 1시간가량 진행되는 조리시연회의 절반가량은 암환자 식이요법에 대한 강의로 이뤄진다. 최 교수는 “갑상선암 환자들이 2주 동안 지켜야 하는 요오드 절식으로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 김치를 못 먹는 것”이라며 “젓갈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메뉴로 오이 물김치를 골랐다”고 설명했다.

강의 및 시연이 끝나자 각 조리대가 부산해졌다. 준비된 채 썬 쇠고기에 소금, 참기름, 후추가루로 밑간을 한 뒤 후라이팬에 볶았다. 여기에 양념을 얹어 버무린 대파, 부추, 무 위에 얹으니 순식간에 첫 번째 요리가 완성된다. 갓 볶은 쇠고기와 상큼한 소스가 어우러져 꽤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긴다.

다음은 ‘오이 물김치’를 만들 차례다. 미리 준비된 밀가루 풀에 소금물을 넣고, 오이소박이를 하듯 오이에 부추를 끼운다. 국물에 칼칼한 맛을 내기 위해 숭덩숭덩 썰어낸 풋고추와 홍고추를 넣고, 갈아둔 양념과 쪽파, 소를 채운 오이를 넣어 두 번째 요리도 뚝딱 마무리.


때마침 다가오는 점심시간, 참가자들은 갓 조리한 음식을 맛보면서 웃음꽃을 피웠다. 대다수가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갑상선암 수술을 받은 여성환자들이다.

2주 전 수술을 받고 방사성동위원소 치료를 기다리고 있는 유미정씨(46)는 대학생 딸과 함께 쿠킹클래스를 찾았다. 유씨는 “요오드 절식을 해야 한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직접 요리도 가르쳐주고 맛볼 수 있게 해줘서 유익했다. 몰랐는데 딸이 나보다 요리를 더 잘하더라”며 만족스런 표정으로 집에 가져갈 오이물김치를 포장했다.

병원계 서비스 문화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양상은 다양하지만 환자들의 입맛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대형병원간 요리 경쟁이 가시화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강남세브란스병원은 다소 분위기가 침체될 수 있는 암전문병원 안에 요리교실을 운영하면서 입소문을 탄 예다.

환자들에게 직접 요리를 가르쳐주진 않더라도 다양한 메뉴 개발로 입원 생활의 활력을 돋우는 사례는 많다. 공통분모는 중증질환의 대명사인 암환자를 타깃으로 한다는 것. 독한 항암치료와 수술 후유증으로 심신이 지친 암환자들을 위해 병원에서는 각양각색의 아이디어로 환자 입맛을 유혹하고 있다.

삼성서울병원 영양팀은 약 2년 전부터 암환자를 위한 맞춤식 신메뉴 21종과 영양보충간식 23종을 선보여 환자들로부터 꾸준한 호응을 얻고 있다.

이를 위해 영양팀은 암환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 일반 환자식으로는 만족도가 떨어진다는 결론을 내리고 환자들이 선호하는 반찬을 엄선하는 치밀한 사전 작업을 거쳤다.

식욕이 현저히 떨어진 암환자들을 위해 도입한 영양보충간식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삼성서울병원은 암환자 중 일반 암환자식의 섭취량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식욕부진 환자들을 대상으로 영양보충간식을 제공하고 있다.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도 암환자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뒷심을 발휘하는 중이다. 병원은 최근 영양죽, 비빔면 등 암환자를 위해 개발한 맞춤식단 11종류 시식 평가회를 가졌다.

영양팀이 수차례 실험조리를 통해 부드러운 음식을 선호하는 암환자를 위한 죽과 브로콜리, 잡곡, 마늘 등 항암효과가 높다고 알려진 재료를 활용한 음식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서울성모병원 김지연 영양팀장은 “대다수 암환자가 치료로 인한 식욕부진으로 힘들어하는데, 이로 인한 영양 불량은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서 “암환자들의 즐거운 식사를 도와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 외식업체와 손잡고 본격적으로 건강식 캠페인을 전개하는 병원도 생겼다. 이화의료원은 지난 7월 세계적인 뷔페 레스토랑 ㈜토다이 코리아와 제휴를 맺고 암 예방 치료에 좋은 ‘건강식 캠페인’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해당 캠페인은 이화의료원의 진료과목별 암 전문의가 암 예방 및 치료에 좋은 식재료를 선정하고 토다이 측 요리사들과 함께 아이디어 회의를 거쳐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그간 병원 중심으로 진행된 환자식 개발이나 쿠킹클래스와 달리 뷔페 레스토랑을 무대로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암 전문의들이 추천하는 건강식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의료서비스 개념을 확장시킨 의미 있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대형병원이 경쟁적으로 ‘먹을거리’와 관련한 서비스 아이템에 열을 올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병원계에서는 한층 높아진 환자들의 눈높이와 서비스에 대한 인식에 발맞춘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먹을거리 관심&예방과 서비스 결합

몸에 좋은 음식은 맛이 없다는 통념을 뒤집고 힘겨운 투병 생활을 하는 환자들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수요가 생긴 것이다. 첨단 의학의 발달로 대형병원 간 의료기술의 격차가 좁혀진 상황에서 병원 내 음식 문화에 새로이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이유다.

치료에서 예방으로 의료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암 예방에 좋은 식이요법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이 같은 현상을 뒷받침한다. 요리사는 의사에 전문적인 의학정보를 제공받음으로써 기능성과 신뢰도를 높이고, 의사는 질병 예방이라는 역할을 다하고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병원과 외식업계의 ‘행복한 만남’이라 할 수 있다.

강남세브란스 암전문병원 손승국 원장은 “암수술을 받고 음식 조절을 해야 하는 환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많이 받는다. 병원에서 여는 요리교실이 입소문을 타면서 타 대형병원에서도 문의가 올 정도”라며 “쿠킹클래스는 병원 이미지 상승의 숨은 강자”라고 말했다.
이은빈기자 cucici@daily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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