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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가 의사들에 띄운 편지
[ 2010년 12월 24일 22시 44분 ]
저를 만나기 위해서는 윗 옷을 걷어 올려야 해요. 그래요. 저는 뽀오얀 속살을 좋아해요. 그렇다고 음탕한 생각은 사절이에요. 보지 못하니 제게 속살은 화중지병(畵中之餠)과 같지요.
그렇다고 무작정 속살을 탐내는 것은 아니에요. 열길 물 속보다 어렵다는 한길 사람 속을 알아 보는게 제 임무거든요. ‘쿵쾅 쿵쾅’ ‘쌕~쌕’ ‘그르릉~그르릉’…제가 주로 듣는 소리들이에요.
이런 소리들의 아다지오-안단테-모데라토-알레그레토, 혹은 중저음, 고음 등으로 몸속 세계를 어림 짐작하는게 제 소임이에요. 인간의 청각으로는 불가능한 소리도 저를 통하면 들을 수 있거든요.
그래요. 제 이름은 청진기(Stethoscope)예요. 그리스어로 ‘가슴(stethos)’과 ‘검사하다(skopein)’의 합성어랍니다. 즉 소리로 가슴 속을 검사하는 기구이지요.
잘 아시겠지만 저는 심장 박동음(心音), 호흡 소리(肺音), 장 소리(腸音), 혈관음(血管音) 등 인체에서 나는 여러 소리의 특성을 파악해 질병을 진단해요.
때문에 저는 흰 가운과 함께 현대 의사들의 상징으로 불려요. 의사들은 분신처럼 저를 끼고 다니지요.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호강을 한 것은 아니에요.
중세 서양과 이슬람권에서는 의사의 상징은 요병(尿病,오줌병)이었어요. 우리 말로는 ‘요강’ 쯤 되겠네요.
이는 고대부터 근대초기까지 서양의학의 주도적 담론이었던 체액설(體液說, humoral theory)의 자연스런 귀결이자 충직한 대변자였지요.
이 시대 의사들은 요병 속에 들어있는 환자 소변의 색깔과 점도를 관찰하고, 냄새를 맡아보며, 필요하면 맛도 보는 방법을 통해 환자 상태를 진단했고 예후와 치료법을 결정했어요
물론 지금까지도 오줌검사법은 흔히 통용되고 있지만 첨단 기계를 사용하는 현대의학과는 달리 당시에는 의사들의 시각, 후각, 미각이 검사결과의 전부였지요.
요병에 이어 제가 현대의사의 상징이 된 것은 꽤나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요. 참으로 간단한 모양새지만 이래봬도 구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몸이랍니다.
여러분의 정신적 지주인 히포크라테스는 제 할아버지 뻘 되겠네요. 고대 그리스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가 환자 가슴에 자신의 귀를 밀착시켜 직접 심장 뛰는 소리를 들으며 진찰한 기록이 있으니 말이에요.
할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가 청진(聽診)의 개념을 고안했지만 제가 정식으로 태어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에요. 그 전까지는 타진(打診)이라는 진찰법이 일반적이었다고 하더군요.
오스트리아 출신의 ‘아우엔부르거’라는 의사가 환자의 가슴 속을 알 수 없어 고민하던 중 어린시절 아버지를 따라 가봤던 술통창고가 생각이 났데요.
맥주통이 너무 커서 들여다 볼 수 없을 때 주먹으로 두드려 나는 소리의 차이로 맥주 양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알아내곤 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타진(打診)’이라는 진찰법을 고안해 냈답니다.
하지만 두들겨 보는 것 만으로 병의 형편을 정확히 알 수 있었을까요?
제 아버지 라에네크(Rene Laennec)는 바로 이 의문에서 저를 생각해 냈다고 하셨어요. 제 아버지는 1781년 프랑스 브루타뉴 지방 캄페르에서 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유년시절 허약해 보이는 몸집과 조금은 창백한 듯한 얼굴이었데요. 요즘 같으면 학교에서 ‘왕따’ 당하기 십상이었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삼가시더라구요.(*^^*)
전문 병리학자가 된 아버지가 어느 날 산책을 하던 중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본게 제 탄생의 기원이 됐어요. 시소를 타던 한 아이가 긴 나무 막대를 못으로 박박 긁으면 반대 편에 있던 아이가 판자에 귀를 대고 듣는 놀이를 보게된 거에요.
‘옳지, 이렇게 하면 환자의 몸에 귀를 대지 않아도 몸 속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겠구나’ 평소 여자 환자의 가슴에 귀를 대기가 난처했던 아버지 다음 날 당신의 진찰실에서 종이를 말아 실험을 시작했어요.
아버지는 우여곡절 끝에 긴 원통형의 나무막대기를 만들었어요. 의학사에 ‘원조 청진기’가 등장한 것이지요. 이렇게 탄생한 저는 의사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이후 성형에 성형을 거듭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어요. 그 사이 의사들의 상징이 된 것은 물론이구요.
하지만 아주 오랜 세월동안 ‘의사들의 필수품 1호’였던 제가 요즘들어 차디찬 홀대를 받고 있어요. 수 개월째 책상 서랍에 위폐 시키더니 이젠 아예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아요.
이게 다 쭉쭉빵빵 잘빠진 첨단의료 장비들 탓이에요. 언제부턴가 녀석들이 진료실에 들어오면서 제 존재감이 줄어들기 시작했어요.
녀석들은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라며 저를 비웃어요. 솔직히 소리뿐만 아니라 사람 몸 속을 훤히 보여주는 녀석들이 대단하긴 해요. 그래서 반항을 할 수도 없어요.
요즘은 하루가 다르게 보다 쎈놈들이 등장해요. 상상초월 기능을 탑재한 녀석들이 나올 수록 저는 자꾸만 움츠러 들어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화려한 과거도 첨단기술 앞에는 무용지물이에요. 이런 상황의 저변에는 의사 혼자만 정보를 독점하는 것으로 느끼는 환자들의 소외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어요.
저를 통해 환자의 상태를 듣는 것은 의사 뿐이잖아요. 환자들은 의사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울 수 밖에 없던 구조였어요. 나름 불만도 생겨났죠.
다소 일방적이던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첨단 기기들이 등장하면서 변화되기 시작했어요. 환자들에게 직접 보여주고 들려주니 반응이 좋아졌어요. 의사 입장에서는 진단의 신빙성이 향상됐고, 환자들은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서 진료실 풍경도 달라지게 됐어요.
이 과정에서 저에 대한 의사들의 의존도가 확 줄어 들었어요. 일부 의사들은 아예 저를 찾지도 않아요. 서글픈 현실이지만 마냥 가슴만 치고 있을 수는 없어요. 요즘 저는 의심(醫心)을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에요.
물론 신출 귀몰한 녀석들의 능력을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제가 갖고 있는 능력을 배가 시키는 전략을 세웠어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아날로그 대신 디지털로 탈바꿈했더니 성능이 무려 20배나 좋아진걸요. 무선통신을 통해 컴퓨터 또는 다른 단말기에 제가 들은 소리를 전송하기도 해요. 환자들은 컴퓨터나 휴대전화기 등을 통해 자신의 심장과 폐 움직이는 소리를 언제, 어디서든 들을 수 있어요.
제 절치부심(切齒腐心)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는 모르겠어요. 진료 패러다임이 청진(聽診)에서 시진(視診)으로 바뀌고 있는 만큼 아무리 몸부림 쳐봐도 제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 것 같아요.
그래도 이 것 만은 기억해 주세요. 의과대학 임상실습 시절 흰가운 주머니에 저를 꽂아 넣으며 설레였던 그 기억말이에요. 두 손으로 저를 꼭 품어 온기를 만든 후 진찰을 시작하는 의사의 모습에 감동 받는 환자들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두요.
현대의학의 소용돌이 속에서 의사들과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해 온 저를 부디 내치지 말아 주세요. ‘의사의 상징’이란 별칭을 이대로 빼앗기고 싶지 않은 제 마음을 헤아려 주세요.
도움말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교실 황상익 교수
참고서적 : ‘의학의 역사’(재컬린 더핀 지음, 신좌섭 번역, 사이언스북스), ‘서양의학의 역사’(이재담 지음, 살림출판사)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겨울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박대진기자 djpark@daily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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