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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 벗어난 의대생들 방학 '짜릿'
[ 2010년 12월 31일 22시 00분 ]
얼마 전 편한 자리에서 만난 한 의대생은 “의대 말고는 다른 분야에서 아는 사람이 없다”며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기자를 쳐다봤다.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바깥세상’은 구경해본지도 오래됐다는 그의 한숨이 과장으로 들리지 않은 것은 그만큼 폐쇄적인 의사 양성과정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의사가 되겠다는 고매한 꿈을 안고 의과대학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의대생들은 최소 6년, 이후 기약 없는 시간들을 학교와 병원에서 보낸다. 이렇게 숨 돌릴 틈 없이 돌아가는 의대 생활에 선물처럼 주어지는 방학은 학생들에게 한줄기 빛이 된다.

몇 해 전부터 국내 유수 의과대학에서 학생들의 방학을 ‘사회생활을 경험하는 기간’으로 활용하고 있어 화제다. 일명 ‘특성화 선택실습’ 과정을 통해 의대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개인의원, 법률사무소, 해외 의대로 발을 넓히는 의대생들. 제도가 탄생한 배경은 무엇이며, 의과대학에서는 이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을까.

다양화·개성화 요구 부응하는 교육과정으로 각광

특성화 선택과정은 획일적인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들에게 자율적으로 과정을 선택하도록 함으로써 개개인의 관심과 잠재적 능력을 최대한 개발하기 위해 고안됐다. 의사로서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이해와 안목을 넓히고 사회진출을 위한 진로탐색의 기회를 부여한다는 거창한 목적을 갖고 출발한 셈이다.

현재 해당 과정이 가장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는 곳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이다. 연세의대는 10여 년 전인 1990년대 후반부터 특성화 선택실습 과정을 본격 운영해왔다. 교내에는 특성화 선택과정 위원회가 별도로 조직돼 있어 의대 교수가 돌아가면서 2년 임기로 위원장을 맡는다. 선택실습에 연세의대가 쏟고 있는 각별한 애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특성화 선택과정 위원회 라선영 위원장(종양혈액내과)은 “의료계가 아닌 다른 분야로도 의사가 진출하는 것을 학생 때 직접 보게 하는 것은 진로 선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며 “한살이라도 젊을 때 얼마나 넓게 보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선택과정을 이수해야 하는 대상은 본과 4학년(실제적으로는 겨울방학을 맞이한 본과 3학년)으로, 매년 12월~3월 6주에서 8주 사이에 일정이 진행된다. 실습기관을 선정한 대상자가 학습계획서를 작성해 제출하면 지도교수 허락과 실습기관에서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때 실습기관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대학에 제출해야 하는데, 대상자의 실습내용 검토를 거쳐 위원회에서 승인이 결정되면 실습을 시작할 수 있다. 학생은 매주 실습일지를 제출해야 하며 지도교수의 학생 평가를 통해 성적을 부여 받는다.

국경 초월…의료계 넘어서는 폭넓은 교류

실습분야는 크게 ▲교내실습 ▲국내 외부실습 ▲의료법 과정 ▲의료선교 ▲해외실습 등 5가지로 나뉜다. 이 중 해외 유수 대학병원에서 현지 의대생들과 동일한 체험을 할 수 있는 해외실습이 최근 인기를 끌고 있다.

연세의대는 미국뿐 아니라 독일, 일본, 캐나다, 프랑스, 스위스, 몽골 등 다양한 외국 의과대학과 자매결연을 확대해나가며 학생들의 해외 진출을 돕고 있다. 라 위원장은 “국내 의료수준도 급격한 발전을 이뤘지만 아무래도 선진국에 가서 발전된 시스템을 배우고 돌아오는 학생들에게서 동경어린 시선이 엿보이는 것은 사실”이라며 “보다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오는 것에 의의를 뒀으면 한다”고 말했다.

울산의대는 예과 1학년부터 방학기간을 이용, 학생들을 해외로 보내는 데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영어실력 등 일정 요건을 충족한 예과 1학년은 2달간 버클리 섬머스쿨 연수를, 2학년은 하버드 연수를 떠난다. 해당 과정에서 학생들은 인문학부터 생화학까지 평소 의대에서 접해보지 못한 교양학부 수업을 자유롭게 수강할 수 있다.

울산의대 김경모 부학장은 “대학생이니까 초중고생 다루듯 할 수는 없지만 의대생들의 인성을 교육시키기 위해 공부 외적으로 도움 줄 수 있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강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의사들의 제약 진출 활성화와 관련해 유명 다국적 제약회사에서 선택실습을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의사들이 기업에 취직하는 대표적인 직종으로서 제약산업 전반에 관해 폭넓은 지식을 쌓을 수 있는 점이 특징이다.

실습기간 동안 의대생들은 여러 회사를 돌아다니며 30여 명에 이르는 제약사 소속 의사를 만날 수 있다. 제약사에서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 현재 개발되고 있는 핵심 신약에 대한 정보도 접할 수 있어 일거양득이다.

사회 곳곳의 목소리를 전하는 기자 생활이 궁금하다면 실습기관을 언론사로 선택하면 된다. 실습 학생은 대학생 인턴기자와 같은 신분으로 정상 출·퇴근을 하며, 기획안 제출부터 취재, 기사작성, 탈고까지 일련의 과정을 습득할 수 있다. 분야는 의료에 한정되지 않고 사회, 정치 문화, 연예, 스포츠를 망라한다.

올해 초 D 주간지에서 선택실습을 한 의대생은 “평소 글쓰기를 배우고 싶었는데 선배 기자들이 잘 챙겨줘서 좋았다”면서 “나중에 기사에 내 이름이 실리는 것을 보고 감격에 젖은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스포츠의학에 관심을 갖고 서울의 한 스포츠 메디컬센터를 실습기관으로 택한 의대생은 “교수님이 가끔 농구나 배구경기에 데리고 가서 운동선수를 많이 봤다”며 “정형외과 수술과 스포츠재활이 이뤄지는 진료 현장을 체험할 수 있어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암묵적 자유 시간·실습과정 자율성 조절 관건

의사들의 다양한 사회 진출을 모색하고 이해시킨다는 취지는 좋지만 운영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작용도 간과할 수 없다. 핵심은 실습기관을 선정하는 대상 학생들의 자율성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측면이다. 가뜩이나 개인 시간이 많지 않은 의대생들로서는 소중한 방학이 의무적으로 채워야 하는 또 다른 실습으로 변질된 것에 대한 불만이 쌓이기도 한다.

지난 2008년 의대 커리큘럼 개편 과정에서 외부 선택실습을 신설한 고려의대는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안이해지는 학생들의 실습 태도에 개선책을 강구하고 나섰다. 고려의대 김병수 교육부학장은 “학생들이 처음에는 신기해하면서 많은 호응을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선배들이 밟은 과정을 답습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다만 ‘학생들을 의미 있게 놀게 하자’는 애초 목적으로 본다면, 교육적 효과는 미약하더라도 견문을 넓힌다는 것에는 의의를 둘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제 경험 차원을 넘어 학생들 스스로 내재화를 어떻게 시킬 것인지가 과제로 남아 있다.

올해 초 동네의원에서 선택실습을 한 의대생은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순히 쉬려는 의도로 실습기관을 택하는 동기들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방학이라고 공식적으로 쉴 수 있는 기간이 없어 선택실습이 실질적인 방학이라는 인식이 학생들 사이에 퍼져 있다”면서 “개인적으로는 일차진료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는 이점도 있었지만 지나치게 형식적인 측면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선택실습의 취지는 공감대를 얻고 있는 만큼 학생들의 자율성을 지나치게 침범하지 않으면서 운영의 체계화를 기한다면 취지는 충분히 살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의사는 사회와 소통할 줄 알아야 하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고려의대 김병수 부학장은 “전문성만 갖출 게 아니라 T자형(넓고 깊게 보는)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 선택실습 운영은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본다”면서 “실습기관과의 네트워크 구축을 어떻게 할 것인지도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세의대 라선영 특성화 선택과정 위원장은 "선택실습의 성패는 해당 부서와 지도교수 관심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며 "멘토링 그룹으로 방식을 변경하고 피드백이 보다 원활히 될 수 있게 하는 등 지속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은빈기자 cucici@daily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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