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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 취미가 된 국내 당뇨병 대가(大家)
[ 2011년 04월 17일 21시 04분 ]
젊은 시절 걸어 다니는 '내과학 교과서'로 불리던 의사가 있었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이든 열심히 하던 이 의사는 우리나라 의학계에 임상연구라는 개념이 도입되던 시기 한 일본 의학자가 쓴 ‘임상의학 연구서설’을 접하고 희열을 느꼈다. 이 기쁨을 동료들과 나누고자 그는 바로 번역에 매달렸고 마침내 책을 출간했다. 김영설 경희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장 겸 의과대학장의 번역 활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 후 20년, 김영설 학장은 신상명세서의 ‘취미’란을 ‘번역ㆍ출판’으로 채우고 있다. 최근 '병원의 품격(品格)'이란 책을 번역해 발간, 품격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 그를 연구실에서 만났다.
[편집자주]
“번역은 돌파구 찾아주는 무기”
경희의료원 본관 5층, 내과 의국 옆에 위치한 김영설 학장의 연구실은 입구부터 책으로 꽉 차 있었다. 첫 번역물을 출간한 지난 1991년부터 그는 지금까지 80여권, 한 해 평균 4권의 책을 번역해 출판하고 있다.
그런 그답게 번역 이야기가 나오자 미소가 얼굴을 떠나지 않았고, 술술 이야기를 이어갔다. 전문 번역가도 어렵다는 일을 그가 20년 넘게 꾸준히 해올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학문적 갈증, 목마름이었다.
1981년 내과 전문의를 마치고 경희의료원 내분비 연구실에서 연구를 하던 시절, 한국 의료계에는 임상에서 얻은 소견을 실험 연구에 접목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하지만 임상연구라는 개념 도입 초기 단계였던 한국에는 마땅한 참고 서적이 없었다.
김영설 학장은 “1988년 수나하라 시게이치라는 일본 의사가 쓴 ‘임상의학 연구서설: 방법론과 윤리’를 접하고 엄청난 희열을 느꼈고 그 책을 동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렇게 나온 책이 ‘임상의학 연구 방법론’. 이후 김 학장은 연구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 마다, 혹은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을 준비할 때마다 번역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미래를 전망했다.
시대 따라 바뀌는 관심 분야…번역→궁금증→번역
김영설 학장이 번역하는 책의 대부분은 일본 서적이다. 1985부터 1년간 일본 동경여자의과대학에서 연구원 시절을 보낸 것이 그의 번역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연구의 필요에 의해 시작된 번역 작업이 새로운 방향을 찾는 길이 되면서 김영설 학장은 여가가 생길 때마다 다양한 방면에서 번역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전공인 내분비학 분야에 그치지 않고 의학계 새 흐름에 따라, 맡은 보직에 따라 그의 손은 분주히 움직였다.
김영설 학장은 “지금 생각해보면 전공 분야인 당뇨병 말고도 참 많은 분야 책들을 작업 했고, 새로운 것이 있으면 번역부터 먼저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첫 번역서 출간 후 임상연구가 크게 발전하면서 근거중심의학이라는 새로운 조류가 등장할 기미를 보이자 그는 2000년 ‘증거의학을 위한 임상의학 연구 방법론’을 출판해 대학원 교재로 사용하며 후학들에게 새 조류의 등장을 알렸다.
분자생물학 발전의 시기에는 ‘분자생물학 이해’, ‘분자의학’, ‘유전질환 카운슬링의 이론과 기법’ 등을, 2001년 의약분업 당시에는 ‘실전 약리학’, ‘약 처방의 달인되기’ 등을 번역해 의사들을 위한 약리학 분야에 큰 관심을 두기도 했다.
그가 맡았던 보직도 번역 분야 다양화에 한 몫 했다.
경희의료원 의학정보센터장 시절에는 의료정보 및 병원 전산화 분야, 동서의학대학원장 시절에는 동서의학 교류 및 대체의학 분야, 병원장 시절에는 의료경영 및 의료사고 분야, 의전원장 겸 의대학장을 맡으면서는 교육과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책을 번역했다.
이 밖에도 당뇨병, 비만, 최신 의료장비 해설서, 일반인들을 위한 건강서, 의학논문 작성법 등 그의 손길이 미친 분야는 그야말로 광범위하다.
김 학장은 “내 공부를 위해서 시작한 번역이 크게 돼버렸다”면서 “돈도 안 되는 책을 출판해준 출판사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라며 크게 웃었다.
돈? “100권 번역 목표-의사들 책 많이 읽었으면”
출판사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번역으로 돈 벌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가장 많이 팔린 책이 고작 100권”이라면서 “돈을 벌기위해 번역을 했다면 이렇게 오래 꾸준히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항변했다.
“연구가 난관에 봉책 했을 때 돌파구를 찾고, 생각을 정리하고, 시대의 흐름을 가늠해보고, 동료들과 환자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주고자 번역을 한다”고 재차 강조하는 김 학장은 “100권을 채울 때 까지는 열심히 해서 많은 이들에게 책을 나눠주고 싶다”고 목표를 밝혔다.
김영설 학장은 “사실 책이 나오면 부지런히 동료, 후배들에게 나눠주는데 호응이 생각보다 적어 섭섭할 때가 아주 가끔 있다(웃음)”면서 “우리 의사들이 정말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치열한 경쟁으로 의사들의 삶에 점차 여유가 없어져 안타깝고, 그로인해 독서량도 줄어드는 것 같아 아쉽다”면서 “이런 시대적 변화가 병ㆍ의원 본연의 모습을 훼손하지 않을지 우려스럽다”고 덧붙였다.
김영설 학장은 이런 고민에서 경희의료원 연구지원팀장 이종훈 박사와 최근 ‘병원의 품격(品格)’을 번역해 발간했다.
그는 “최근 국격에 대한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는데 조만간 병원 본연의 자세를 논하는 의료기관의 품격도 화두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투자, 대형화, 최신화 등 경영의 문제에 병원의 모든 관심이 쏠려있는 가운데 진정으로 환자를 위해 진료 하는 병원, 제도나 규제에 흔들림 없이 끊임없이 앞을 내다볼 수 있는 힘을 갖춘 병원의 역할이 절실하다는 설명이다.
김영설 학장은 “의료기관 인증평가, 영리병원 도입 등 의료계가 고도의 양극화 과정에 있는 이 시기에 진짜 병원의 역할이 무엇인지, 품격 있는 병원은 어떤 병원인지 진지하게 고민 해봤으면 좋겠다”고 목소리에 힘을 줬다.
“글쓰기는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
김영설 학장은 “번역을 하면서 다양한 분야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번역ㆍ교정ㆍ색인ㆍ출판 과정에서 습득한 지식을 완벽히 내 자산으로 만들 수 있어 취미 생활로는 100점”이라고 번역을 예찬했다.
번역은 완료했지만 판권 문제 등으로 빛을 보지 못한 잠자는 파일을 볼 때마다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는 김 학장은 “번역서 100권을 채우고 나면 단순한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결합론을 뛰어넘어 통합의학을 주제로 문화인류학적 모델이 될 만한 진짜 내 책을 써보고 싶다”는 ‘취미’ 활동의 원대한 종착점도 공개했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대화는 사람을 풍부하게 만들고, 글쓰기는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인용하기 좋아한다는 김영설 학장. 그의 컴퓨터에 들어 있는 잠자는 번역서들이 모두 세상의 빛을 볼 날을 기다려본다.
최종학기자 haga81@daily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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