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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어야 산다" 대한민국 의사들 명함 열전
[ 2011년 11월 01일 02시 55분 ]
미국 상류층인 주인공이 사이코로 변해가는 과정을 통해 상류사회에 대한 조롱을 담은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주인공 패트릭은 자신의 것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세련된 명함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친구인 폴을 도끼로 난자한다. 2000년에 개봉한 이 영화 속 주인공이 2011년에 살고 있다면 학살 수준으로 시나리오를 각색해야 할 만큼 명함의 진화 속도가 무섭다. ‘튀어야 산다’는 무한경쟁 현실이 명함의 진화에 불을 당기면서 그야말로 아이디어 전쟁을 방불케 하고 있다.
새싹이 돋아나는 명함부터 동전으로 긁어야 보이는 복권 명함, 노인층을 위한 돋보기 명함, 보딩패스 명함, 면도칼 명함, 콘돔 명함 등 발명품에 가까운 수준이다. 이 밖에도 어차피 보지도 않고 버려지는 명함을 비꼬는 ‘먹어서 없애는 명함’도 등장했다. 땅콩, 껌, 과자류에 새긴 이 명함은 받는 즉시 먹어 버리라는 유머러스한 발상으로 인기다.
보수사회의 대표격으로 변화에 둔감한 의료계에도 최근 몇 년새 톡톡 튀는 명함이 부쩍 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만큼의 파격은 아니지만 명함을 통해 자신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사들의 노력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예술의 ‘혼(魂)’담다
예술 작품을 활용한 명함은 의사들 사이에서도 인기다. 품격을 유지하면서도 상대에게 확실한 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선호도가 높다.
서울의대 출신의 건국대학교 김진규 총장은 국내 유명 서예작가로부터 받은 서체를 명함에 활용, 품격과 높은 예술성을 평가 받고 있다.
국가 문화재 관련 사업에도 주축으로 참여하고 있는 이 작가가 개인 명함을 위해 서체를 내준 것은 김진규 총장이 유일한 사례로, 개인을 넘어 학교의 발전을 기원했다는 전언이다.
김 총장은 명함의 호응에 힘입어 해당 서체를 건국대학교 홍보물은 물론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할 계획까지 갖고 있다.
경북대학교병원 조영래 前 병원장의 명함에는 병원 역사의 상징인 본관 건물이 사진도 아닌 그림으로 담겨 있다.
병원 상징물을 명함에 넣음으로써 스스로는 사명감 고취를, 상대방에게는 병원 역사와 전통을 각인시킬 수 있다는 판단의 결과물이다.
경북대병원의 전신인 경북도립 대구의원이 화재로 소실된 뒤 1928년 현재의 위치인 대구시 중구 삼덕동에 지어진 이 건물은 2003년 문화재 사적 433호로 지정됐다.
“얼굴이 이름이죠!”
사진 박힌 명함이야 흔하디 흔하지만 범상찮은 사진들이 의사 명함에 등장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핵의학과 교수들 명함에는 큼지막한 인물사진이 들어 있다. 하지만 그 사진들이 기묘하다. 캐리커쳐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사진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이 교실 큰 어른인 이명철 교수(서울대학교 발전기금 재단 부이사장)가 후배 교수들에게 ‘의사PR 시대’를 역설하며 반강제로(?) 만든 명함이다.
대신 경직된 증명사진이 아닌 전문용어로 ‘누끼따기’라는 기법을 활용한 합성사진을 배치, 시각적으로 한층 품격을 높였다.
현재 이명철 교수를 위시한 정준기, 정재민, 이동수, 강건욱 교수의 명함집에는 수 년째 이 명함이 들어 있다.
부부사진이 나란히 등장하는 명함도 눈길을 모은다. 최근 세계병원연맹 회장에 당선된 대림성모병원 김광태 이사장의 명함에는 부인 변주선 행정원장과 함께 찍은 사진이 담겨 있다.
“아내가 있기에 내가 존재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평소 애처가로 소문난 김 이사장의 아내사랑이 물씬 풍기는 이 명함은 본인이 직접 고안해 냈다.
실제 세계걸스카우트연맹 아태지역 위원회 의장을 역임한 변주선 행정원장은 그동안 남편인 김광태 이사장의 대외 활동에 내조를 아끼지 않으며 병원계 잉꼬부부로 정평이 나 있다.
환자의 이름으로!
통상적으로 의사들 명함에서 휴대전화 번호를 찾기란 여간 힘든게 아니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환자들 전화의 대비책으로 명함에 번호를 남기지 않기 때문.
하지만 이 의사 명함에는 휴대전화 번호가 절반을 차지한다. 자신의 이름보다 휴대전화 번호를 크게 적어 놓은 이는 바로 고려대학교 안산병원 최종욱 前 병원장.(現 관악이비인후과 원장)
‘환자들 때문에 휴대전화 번호를 기입하지 않는다’는 다른 의사들과는 달리 최종욱 원장은 ‘환자들 때문에 휴대전화 번호를 기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의사와 연락이 닿질 않아 발을 동동 구를 환자들의 애절한 심정을 잘 알기에 그는 병원장 시절부터 명함에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뒀다.
개원가 원장들의 명함 뒷면에는 지도나 약도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환자들이 다음 내원시 보다 쉽게 찾을 수 있도록한 작은 배려다. 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명함은 왠만한 의사들 사이에 일반화 된지 오래고, 최근에는 스마트폰 열풍에 편승, QR코드를 배치한 명함도 부쩍 늘고 있는 추세다.
뿐만 아니라 중소병원의 경우 진료과별 의료진의 진료시간이나 전문분야 등 환자들에게 실질적인 정보를 빼곡이 적어 놓기도 한다.
의사 명함 맞아요?
해외로 눈을 돌리면 기발한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명함이 봇물을 이룬다. 특히 ‘의사’라는 직업의 특성을 살려 환자에게 확실한 각인 효과를 노리는 톡톡 튀는 명함들이 이목을 끈다.
풍선을 불면 신상정보가 보이는 일명 ‘풍선 명함’의 주인은 바로 천식과 기관지염 환자들을 주로 진료하는 호흡기내과 전문의다.
영상의학과 전문의 명함에는 손마디가 찍힌 엑스레이 사진이 담겨 있고, 남성용 피임기구인 콘돔을 명함으로 사용하는 비뇨기과 전문의도 인기다.
재활의학과 전문의의 명함은 고무로 돼 있다. 하지만 이 명함은 이름과 전화번호가 너무 작게 인쇄돼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 의사가 환자들의 근력을 키워주기 위해 양 옆을 잡고 당겨야 볼 수 있도록 고안했기 때문이다.
치과의사 명함도 재미있다. 새하얀 종이에 충치가 하나 그려져 있고, 속지를 빼면 충치는 깨끗한 치아로 바뀐다. 썩은 부분은 명함속지의 인쇄내용이다.
이 외에도 체온증감에 따라 색이 변하는 명함과 원적외선을 발산하는 명함, 플라스틱으로 표면을 처리한 지압기능 명함 등도 의사들 사이에서 인기몰이 중이다.
박대진기자 djpark@daily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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