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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없고 책임도 안지는 '보건의료정책'
[ 2011년 12월 29일 21시 21분 ]
금융실명제가 처음 도입된 지난 1993년 당시만 해도 ‘실명제’라는 단어에 생소함을 느끼던 한국사회였지만 이젠 모든 분야에서 필요조건이 될 만큼 이 제도는 완전히 뿌리 내렸다. 배추 한 포기에도 농작자의 이름이 적혀 나오고, 식당 종업원들의 명찰 부착 의무화가 된지는 이미 오래일 정도로 1, 2, 3차 산업을 막론하고 우리사회에 ‘실명제’는 너무나 분명한 명제가 돼 버렸다. 하지만 정작 국가정책을 다루는 중앙부처들에게 실명제 도입은 여전히 먼나라 얘기다. 보건의료정책을 수립하는 보건복지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때문에 복지부 정책 하나에 울고 웃어야 하는 의료계에서는 정책실명제 도입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복지부가 자발적으로 도입하지 않는다면 의료계 차원에서 타의적으로 정책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복지부는 잦은 인사이동 등 업무의 비연속성을 이유로 정책실명제 도입에 난색을 표하지만 이는 ‘책임행정’ 아래에서 당위성을 갖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편집자주]
정책실패에 고혈(膏血) '주르륵'
매년 60억씩 총 360억원. 보건복지부가 쓰디쓴 정책실패의 수업료로 무려 6년에 걸쳐 지불한 금액이다. 이 비용은 고스란히 국민의 혈세로 지급됐다.
복지부는 지난 2006년 의약품유통종합정보시스템 구축 사업과 관련, 삼성SDS에 360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이 시스템은 의료기관의 의약품 주문 및 재고관리, 대금정산, 거래정보관리 등을 전산화 하는 작업으로, 1999년 삼성SDS가 복지부와 계약을 맺고 시스템을 구축했다.
하지만 의약품 납품비리 근절을 목표로 수 백억원을 들여 시스템을 개발했지만 의료기관들이 외면하면서 유명무실해졌고, 큰 손실을 입게된 삼성SDS는 복지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4년 간 진행된 법정공방 끝에 법원은 360억원의 손해배상 판정을 내렸고, 복지부는 아직까지 국민 혈세로 이 금액을 납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처럼 보건의료 분야에서 정책실패 사례 찾기는 어렵지 않다. 지난 10월 보건복지부는 대형병원으로의 환자쏠림 현상을 방지함과 동시에 1차 의료를 살리겠다며 ‘본인부담 약제비 차등화’라는 제도를 시행했다.
고혈압, 당뇨 등 52개 경증질환으로 종합병원 이상 의료기관을 방문하면 기존 30%였던 약제비 본인부담률을 상급종합병원 50%, 종합병원 40%로 각각 인상한다는 내용이었다. 즉, 가벼운 질병으로 대형병원을 찾으면 약제비 부담이 늘어나니 1차 의료기관을 이용하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이 제도는 시행 직후부터 실효성 논란에 휩싸였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논의 단계에서부터 정책 실패에 대한 우려가 팽배했다.
1, 2, 3차 의료기관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선택권이 부여된 상황에서 약값 몇 푼으로 환자들의 발길을 돌린다는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는 지적이었다.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수혜를 예상했던 1차 의료기관 환자 수는 미동도 없고 오히려 일부 상급종합병원은 제도 시행 후 환자가 늘어나는 기현상까지 일어났다. 결국 기존 상급종합병원을 이용하던 환자들에게 20%의 약제비 부담만 가중된 셈이다.
무리한 정책에 피해를 입은 병원들이 법정공방을 통해 정책실패를 입증한 사례도 있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10월 서울아산병원을 포함한 45개 병원이 복지부를 상대로 청구한 상대가치점수 인하고시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CT, MRI, PET 상대가치점수를 각각 15%, 30%, 16% 인하한 복지부의 조치가 적절치 않았다고 법원은 지적했다. 이번 소송의 핵심은 특별한 사유 없이 직권으로 수가를 내린 행위의 타당성 여부. 즉 행위전문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결정하는게 타당하느냐의 문제다.
법원은 “복지부가 상대가치점수를 직권조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문평가위원회의 평가를 거쳐야 하는데 이를 위반했다”고 판시했다.
지금까지 전문위를 거치지 않고 건정심에서 결정된 사례가 수 십건에 달하는 만큼 향후 대규모 송사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 2006년 시행된 식대수가 역시 전형적인 정책실패 사례로 꼽힌다. 비의료 서비스인 식대를 급여화한 복지부 정책은 병원과 환자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병원들은 식대수가가 지나치게 낮게 책정된 탓에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다며 반발했고, 환자들도 식사의 질 저하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식대 급여화에 따른 건보재정 누수는 정책실패에 대한 변명의 여지를 만들지 않았다. 실제 복지부는 1년 동안 4355억6000만원을 식대 급여에 사용했다.
문제는 건강보험 재정 적자가 전년대비 두 배 이상 늘어난 3700억원에 달했고, 감당이 어려워지자 슬그머니 식대 본인 부담률을 20%에서 50%로 올렸다. 이 때문에 입원환자 식대 급여화는 ‘선심성 행정의 극치’라는 뭇매를 맞아야 했다.
가해자 없고 피해자만 있는 정책
이 처럼 환자들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수 백억원의 혈세를 낭비하는 정책이 계속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책임 소재는 늘 불분명하다. 아니 책임론 자체가 제기되지 않는다.
실제 보건복지부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복지부 소속 공무원 59명이 징계를 받았으나 정책실패에 대해 책임을 물은 사례는 전무했다. 이들 공무원이 징계받은 사유는 주로 성추행, 성희롱, 성매매, 무면허, 음주운전, 금품수수 등으로, 명백한 범죄사유에 대해서만 징계가 내려졌다.
즉 복지부 공무원은 아무리 중차대한 정책을 잘못 수립, 집행한다고 해서 징계나 페널티를 받지 않는다는 얘기다.
바로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방책으로 최근 ‘정책실명제’ 도입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정책실명제’란 정책을 주창하고 설계한 공무원 그리고 그 정책을 시행하고 감리한 공무원들의 이름을 확실하게 밝혀 그 정책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를 말한다.
다시 말해 각 정책마다 담당자와 책임자를 명확히 게재해 향후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자는 논리다.
세부시행 방안을 살펴보면 우선 논문에 연구자의 이름을 표기하듯 정책입안서에도 해당 공무원의 이름을 넣는다. 이 때 모든 문서는 번호를 부여하고 전산으로 관리하며 필요에 따라서만 공개와 비공개로 구분한다.
모든 정책입안서에 첫 번째 저자로 이름이 오른 사람은 실무책임자, 가장 나중에 나열된 사람은 최종 집행책임자로 한다.
중간중간에 정책입안서 개정을 하면 의견을 낸 모든 사람의 실명과 의견내용을 추가시키고 각 개정번호가 올라갈 때마다 앞 번과 뒷 번의 내용을 비교하는 개정내역서를 붙인다.
몇 해가 지나 이 개정내역과 개정판들을 다시 볼 수 있게 해 정책의 성과를 판단하고 그에 대한 신상필벌을 하므로써 보다 책임의식을 갖고 정책을 입안할 수 있는 풍토를 유도한다.
대구대학교 경제학과 전승훈 교수는 “정책을 만드는 데 참여한 정치인, 전문가, 공무원 등의 실명을 밝히고, 추진 배경과 상황을 종합적으로 관리해 끝까지 책임을 지게 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누가 제시한 정책인지, 어떤 내용인지를 모르면 금세 기억에서 사라지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게 된다”며 “다만 공무원들은 특성상 ‘복지부동’의 부작용도 예상되는 만큼 적절한 보완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건강복지정책연구원 김정덕 수석연구원은 “의료기관에 대해서는 투명성을 강조하면서 왜 정책입안자들은 공개를 꺼리느냐”며 “자신이 있다면 실명제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고 피력했다.
한국전략문제연구소 하정열 안보전략소장은 정책실명제의 실효성 제고를 위해 분명한 ‘상벌’을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 정책실패에 대한 문책과 함께 정책성공에 대한 포상도 병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정열 소장은 “제도의 효율성과 책임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책성공에 대한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며 “책임을 묻는데 그쳐서는 공무원들의 동기유발이 결여될 수 있다”고 말했다.
책임행정 구현은 이상향?
‘정책실명제’를 통한 책임행정 구현 주장에 대해 복지부는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공무원의 자질이 아닌 구조의 문제’라는 나름의 주장도 내놨다.
복지부 역시 ‘책임행정 구현’이라는 명제에 대해서는 공감했지만 ‘정책실명제’라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거부감을 나타냈다.
‘정책실명제’라는 거창한 표현이 아니더라도 이미 모든 정책에 담당자가 공개되고 있는 만큼 별도의 실명제는 무의미하다는 입장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각종 정책이 추진될 때마다 입법예고나 보도자료 등을 통해 담당자가 명시되고 있다”며 “이미 모든 정책이 실명제화 됐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특히 최근에는 모든 자료가 홈페이지 상에 게재가 되는 만큼 향후 많은 시일이 지나더라도 정책 담당자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고 덧붙였다.
복지부 전현직 직원들은 일련의 정책실패 원인과 책임론 제기는 공무원 개인의 자질이 아닌 구조적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우선 장관이 인사권이나 정책방향 등 전권을 쥐고 있는 현 구조상으로는 정책의 일관성이나 영속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더욱이 복지부 업무에 해박한 실무형 장관이 아닌 정치적 상황에 따라 임명되는 탓에 교체시기마다 정책방향이 달라지는 사례가 부지기수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복지부 퇴임 후 강단에 서고 있는 한 의료계 인사는 “‘복지부 직원은 접대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장관 교체에 따른 정책방향 재설정으로 직원들의 고충이 크다”고 전했다.
특히 잦은 인사이동으로 인해 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고 정책을 수립, 추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도 애로사항으로 꼽았다.
현직 복지부 모 과장은 “정책실명제 자체를 부정한다기 보다 그 제도를 도입할 기반이 마련돼 있지 않은게 문제”라며 “실무자 스스로 우려 속에 진행하는 정책도 있다”고 털어놨다.
이들 직원은 최근 정계에서 ‘복지’가 화두로 떠오른 상황 역시 부담으로 받아들였다. 복지에 대한 정계의 관심이 클수록 복지부 정책방향도 정치력에 좌우될 수 밖에 없다는 우려다.
또 다른 복지부 관계자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일의 우선 순위가 바뀌는 경우가 적잖다”며 “정계의 복지론 열풍은 주무부처인 복지부 입장에서 부담일 수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겨울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박대진기자 djpark@daily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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