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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의전원 방향, 세계적 추세를 보라"


[ 2010년 06월 06일 11시 07분 ]

“답답합니다. 가기 싫다면, 원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준비를 마치고 하고자 하는 곳까지 돌려세우는 것은 문제지 않습니까? 우리 의학교육은 40~50년 동안을 우수한 의사 양성에 모두 할애했습니다. 실제로 훌륭한 의사가 많이 배출됐고 의료수준도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사들이 감기 환자보고 쌍꺼풀 성형수술이나 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우수한 인재를 더 이상 소모해서는 안 됩니다. 기득권층이 고정관념을 버려야합니다. 엄청난 국가적 손실이죠.”

1995년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 의학전문대학원이란 개념을 처음 논의하기 시작했으니 15년이 흐른 셈이다. 이제 막 졸업생이 배출된 가운데 의학계는 ‘의과대학으로의 복귀냐 의학전문대학원 제도 정착이냐’의 기로에서 진통을 겪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의 공식적 언급을 목전에 두고 각 의대 및 의전원의 물밑작업이 한창인 요즘 책임감과 사명이라는 무게감을 오롯이 감내하고 있는 한 개인 역시 초조하긴 마찬가지다.

제도의 밑거름이자 그 시작을 열었던 의전원 추진위원장 연세대 허갑범 명예교수가 바로 그러하다. 그는 의전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이처럼 “그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며 의학계와 국가를 향한 의미 있는 발언을 쏟아냈다.

그의 머릿속은 세계 의학ㆍ의과학 분야의 마루를 쫒고 있었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은 세계적 흐름을 읽고 한참을 앞서 나가고 있지만 최고의 두뇌를 가진 우리나라는 단견을 거듭할뿐 그 추진 동력마저 잃고 있다는 우려가 크다.

“토대 마련된 곳은 고정관념 사로잡혀 묵묵부답”

현재 의대-의전원 병행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일부 주요 대학에서는 의대 복귀 가능성이 점차 우세해지고 있다. 도미노 현상 역시 예상되기도 한다. 가장 큰 명분 중 하나로 현 의전원 체제의 여러 부작용을 들고 있다.

허 교수는 준비조차 안된 대학에서 “호박에 줄그어놓고 수박”이라고 우기다보니 잡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는 근본적 문제를 짚어냈다.

“의욕도 없는 상태에서 아무런 준비 과정 없이 예산 등 국가적 지원을 보고 추진했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현실인 거죠. 저의 책임도 일정 부분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의대에서 이름만 바꾸고 등록금만 올렸지 아무 것도 없다면 이것은 학생을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대학은 오히려 빨리 원위치 시키도록 해줘야 합니다.”

대학의 의욕과 국가 지원이 제대로 결합해야 본래 취지의 의전원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 일본 등은 의대-전문대학원의 구분이 아닌 ‘메디컬 스쿨’이라는 의학대학원 개념을 가지고 있다.

MD-PhD 프로그램 등 의과학자 양성에 이미 오래 전부터 힘을 쏟고 있다는 방증이다. 물론 이 중 대부분은 진료를 보는 임상 의사가 되고 있지만 우수 의사 양성과 더불어 다양한 분야로의 진출이 가능토록 선택할 수 있는 통로만큼은 명확히 확보돼 있다.

한국 의대와 구별되는 대목인 셈이다. 허갑범 명예교수는 “동력 양성 트랙을 구체화하자”고 강조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준비가 됐고 토대가 되는 대학에서 이를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여야 하지만 현재로선 안개 속일 수밖에 없다.

“기초과학ㆍ의학 없이 임상의학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바탕을 키워 나가야 현 의대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가장 선봉에 있어야 할 대학들이 버티고 있다는 것이죠. 답답할 노릇입니다.”

현재 선도형 연구중심병원 등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관련 사업이 대규모 지원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이다. 사병이 없기 때문이다.

“선정된 병원 교수에게 연구하라고 예산 지원을 해주지만 막상 엄두가 안 난다고 하더라구요. 실질적으로 연구를 맡아서 진행해 줄 서포터들은 인턴이다, 레지던트다 병원을 뛰어다니고 있고 정작 본인도 진료하느라 시간 내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연구중심병원이라고 선정은 한다지만 대학과 아귀가 전혀 맞지 않는 상황인 것이죠.”

“국가적 지원과 연구의욕 있다면 노벨상 시간문제”

제대로 된 의전원 제도 정착을 강력히 요구하는 것도 시너지 효과를 예상해서다.

한 예로 2005년 서울 치대가 치의학대학원으로 탈바꿈했다. 대학의 연구의욕과 정부의 연구지원이 맞물려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평가가 의료계 내부에 회자되고 있다는 후문이다.

치의학대학원으로 변화하면서 정부로부터 약 30명의 연구전임교수요원을 지원받고 체질개선에 성공, 일부 교수들은 1년에 SCI급 논문 5편 이상을 내 놓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학장이었던 한 교수가, 찾아갔더니 달라진 분위기에 깜짝 놀랐다고 했어요. 생리학 전공이었는데 연구에 몰두하는 교수들을 보니 환자는 누가 보나 걱정까지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울치대가 환자 진료에 매달릴 필요가 있나요? 최고의 인재들이 모이는 그 곳에서까지 그럴 필요 없다는 생각입니다. 연구를 위해 일부 보고 나머지는 어찌 보면 국가의 몫입니다. 젊은 연구자들 키우고 연구 인력 지원 등 5~10년 정도만 적극적으로 해준다면 노벨상, 20년 후 정도엔 안 나오겠습니까? 의과학자 양성에 힘을 실어야 할 때입니다.”

허갑범 명예교수는 이공계와 함께 가장 먼저 나서야할 의학계가 더딘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에 복잡한 심경이 교차되는 듯 했다.

의전원을 추진했던 사람으로서 의대의 역사를 몸으로 체험했던 사람으로서 이제 앞으로를 내다보지만 그 미래를 바라보는 폭이 보다 얕은 현실에 안타까움이 배어나왔다.

“연구중심대학ㆍ병원, 유기적 운영돼야 성장 동력 탄력”

초기 의전원의 필요성을 설파했던 이유도 진료중심대학과 연구중심대학으로의 명확한 특화작업을 통해 세계적인 흐름, BT 등 산업에 있어 보다 먼저 선상을 지키고 싶은 이유에서였다.

이제 또 한 번의 기회이자 의과학자 양성에 기폭제가 될지도 모를 이번 결정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는 “내가 잘났네, 네가 못 났네 우물 안 개구리처럼 굴지 말자”면서 대학들의 열린 사고를 거듭 주문했다.

“약 30% 내외 정도만 의전원제도로 가면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현 의대 체제를 고수하겠다면 그렇게 하면 되겠죠. 경쟁을 통해 준비된 대학들을 따로 선정해 국가가 나서서 단계적으로 지원 해준다면 대학과 병원이 유기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론, 세계가 아니라고 하는데 골목대장 하려고 하니 참….”

허갑범 명예교수는 기자와의 긴 대화를 “주제넘은 소리, 신세타령”으로 중간 중간 낮췄지만 의학교육에 대한 비전과 가야할 방향 만큼은 확고했다.

책상 주위로 수북이 쌓여 있는 신문과 자료가 방증하듯 그의 책임의식은 깊고 진지했으며 의학계를 향한 가감 없는 진단은 그래서 더욱 날카로웠다.

“의전원의 목적은 우수한 의사양성으로 의대와 그 길을 같이하지만 그 다음은 실로 다릅니다. 물론 대학원의 80~90%는 진료 보는 임상의가 되겠죠. MD-PhD 프로그램을 밟거나 법학, 신약개발, 공중보건 등 다양한 활로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그 기회를 줘야합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주제넘은 소리지만 이제 막 졸업생이 나온 것을 두고 실패니 성공이니 하는 것은 교육의 기본을 잘 모르고 하는 얘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용단이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