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라북도 김제에서 익산 방면으로 23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백산저수지를 맞이한다. 이 곳은 아름다운 서해 낙조와 드넓은 만경평야를 한 눈에 담을 수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이끈다.
백산저수지는 흐르는 물을 막아 모은 담수호가 아닌 양수지다. 섬진강댐에서 방류돼 김제 간선을 타고 흐르는 물을 호남양수장의 펌프로 퍼올려 만들어졌다.
故 박정희 대통령이 식량 증산을 위해 추진한 호남야산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1969년 10월 준공됐다.
저수지 축조 당시 인근에 평야 대신 야산만 가득했다. 주민들은 주로 야산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축조 이후 넓디 넓은 평야가 생겼다, 저수지는 백산면, 공덕면, 청하면 옥토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었고, 본격적인 벼농사가 시작됐다. 주민들도 비로소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권력의 노예가 되며 일그러져 가는 범부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묘사한 윤흥길 소설 ‘완장’의 배경지가 바로 백산저수지다.
동네 건달 종술은 어느 날 마을 저수지 감시원이 됐고 이후 완장을 팔에 차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안하무인격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한다.
완장을 차는 순간 권력의 힘을 맛본 종술은 저수지 감시원을 넘어 독재자와 같은 행태를 보이고, 급기야 감시원 자리에서 해고된 이후에도 온갖 행패와 추태를 서슴치 않는다.
우리 사회의 삐뚤어진 권력 지상주의를 가장 근거리에서 다룬 것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은 권력에 기대 패악을 서슴치 않는 사람들을 얘기할 때 왕왕 인용된다.
얼마 전 발생한 세월호 유가족 대표의 대리기사 폭행사건 이후 이 ‘완장’이란 단어가 곳곳에서 눈에 띈다. 물론 비난 일색이다.
생계형 직업인 대리기사에게 막말과 폭력을 휘두른 것도 모자라 폭행 직후 찾아간 병원에서 의료진에게 “우리가 누군 줄 아느냐”고 소리친 사실은 삐뚤어진 권위의식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줬다.
국민 모두가 이 희대의 비극에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사이 세월호 유가족들은 정치권력화 돼 있었다.
세월호 실종자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 둘 달기 시작했던 노란리본 역시 언제부턴가 유가족들에게는 국회의원들도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는 권력의 상징으로 변질돼 갔다.
급기야 교육부는 전국 시도교육청에 세월호 참사 관련 공동수업과 학교 앞 1인 시위 등을 중단하라는 공문을 내려 보냈고 교내에서의 노란리본 달기도 금지하라고 지시했다.
모든 국민이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며 달아줬던 ‘완장’의 결말은 삐뚤어진 권력 양산이었다. 국민들의 실망과 공분은 지극히 당연했다.
빗나간 완장질은 의료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순수했던 청운(靑雲)의 꿈이 완장을 차는 순간 권력의 탐닉으로 퇴색돼 버리는 사례를 심심찮게 목도했다.
의약단체는 물론 병원, 제약사 심지어 시민단체에 이르기까지 수장들의 못난 완장질은 곳곳에서 목격됐다. 그들의 귀에 조직원들의 한숨이 들릴리 만무했다.
보건의료계 완장질을 논(論) 함에 있어 보건복지부를 빼면 서운하다는 이들이 많다. 선택의 여지 없이 건강보험에 묶여 있는 의료기관들 입장에서 복지부는 부정할 수 없는 ‘슈퍼 갑’이다.
복지부의 정책에 울고 웃어야 하는 처지이다 보니 일견 당연한 현상이다. 특히 요즘들어 일방향적 정책 빈도가 높다보니 이러한 인식이 더욱 배가되는 분위기다.
물론 궁극적 정책 지향점은 ‘국민’이고, 협의를 원해도 의료계가 대화 자체를 거부한다는 복지부의 해명이 뒤따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의료계를 내려다보는 복지부의 시선이다.
얼마 전 한 의약단체 주최로 열린 행사에 복지부 관계자가 당초 예정보다 2시간을 넘겨 도착했다. 수 백명의 청중 앞에 선 그의 첫 마디는 “죄송하다”가 아니었다. 늦은 사유를 얼버무리듯 얘기하고는 바로 강연을 시작했다.
또 다른 사례는 더 가관이다. 현안 논의를 위해 복지부 담당자와 사전약속을 하고 세종정부청사를 찾은 한 의약단체 집행부는 황당함에 분을 삭혀야 했다.
만나기로 했던 담당자가 연락이 되지 않았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 파악된 그의 소재는 세종이 아닌 서울이었다. 이 집행부는 “우리는 전화 한통의 가치도 없는 존재”라며 가슴을 쳤다.
‘일반화의 오류’에 대한 지적은 감수한다. 그러나 의료계를 바라보는 그 시선의 높이를 진중하게 고민해 달라는 당부의 말은 양보할 수 없다.
정부,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국민이 채워준 보건복지부의 완장은 ‘건강사회 구현’에 대한 당부이지 ‘군림하는 권력’은 분명 아닐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