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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회가 이어지던 12월 중순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헤어지기 아쉬웠는지 한잔 더 하자고 제안했다.
알코올이 좀 부족했던 차에 흔쾌히 응했는데 가자는 술집이 상당히 멀었다. 강남에서 동대문 끝자락까지 강추위를 뚫고 가면서 친구에게 물었다. 특별히 그 집에 가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친구는 술집 사장을 잘 안다고 했다. 사무실이 그 근처에 있을 때 판촉 나온 사장을 처음 봤다고 했다. 주간지와 명함 한 장을 손에 쥐고 경비원의 눈을 피해 사무실에 들어온 술집 사장은 90도로 인사하며 한번만 찾아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무단 침입자를 내쫓을 법도 한데 친구의 생각은 달랐다. 외항선을 타다가 처음 술집을 차린 사장의 딱한 사정을 들어주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사무실 문을 두드린 용기에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는 것이다.
겸손하면서도 열심히 가게 홍보를 하는 그를 보고 친구는 어려웠던 시절이 떠올랐다고 했다. 영업사원으로 낯선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던 자신의 모습이 그 술집 사장과 꼭 닮아 보였던 것이다. 연민의 정을 느꼈음이 틀림없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친구가 사무실을 옮긴 뒤에도 이어졌다.
가끔 한잔 할 일이 생기면 지금도 그 집을 찾곤 한단다. 강남의 화려한 선술집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기는 사장의 얼굴에서 훈훈함이 배어 나왔다. 술과 안주 서비스가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영업사원에서 어엿한 중소기업 사장이 된 친구, 고생 끝에 번듯한 술집 사장이 된 마도로스, 두 사람은 어쩌면 넓디넓은 세상에서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오로지 '힘겨웠던 처음'을 겪었다는 이유로 친구가 됐다.
사람에게는 왜 이토록 ‘처음’이 중요할까? 왜 ‘처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겉으로 드러내든 그렇지 않든 ‘처음’을 추억에 새기는 걸까? 그것은 사람의 일생에서, 또 일하고 사랑하는 과정에서 순수함을 잃지 않은 순간이 바로 ‘처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만큼 초심(初心)에는 비교불가의 가치가 있다. 내가 살아가고, 일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최고의 가치로 삼은 것들이 '초심'에 담겨 있다.
어떤 가치관을 갖고 어떻게 살아가야겠다는 학창시절의 다짐이나, 처음 일을 시작하면서 어떤 자세로 임하겠노라 했던 약속, 사랑하는 이에게 어떤 반려자가 되겠다고 고백한 말 한마디 한마디에 초심의 숭고함이 녹아 있다. 이렇기에 초심을 오랫동안 간직한 사람은 인생에, 사랑에 성공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대부분 실패하고 만다.
초심은 절대가치와 꿈을 담은 만큼 지키기가 어렵다. 시경(詩經)에는 ‘미불유초선극유종’(靡不有初鮮克有終)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미불유초’(靡不有初), 즉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지만, ‘선극유종’(鮮克有終), 능히 끝을 얻는 사람은 적다는 뜻이다. 우리가 잘 아는 ‘유종지미’(有終之美)를 강조한 말로, 처음 시작할 때의 결심을 마지막까지 지키는 사람이 매우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초심을 망각해 비난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수습기자 시절의 기개와 용기를 잃고 현실에 타협하는 언론인,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무색하게 부와 권력을 쫓는 의사들도 눈에 띈다. 국회의원 배지의 광택이 약해지기도 전에 사리사욕을 쫓는 정치인이 있고, 일류기업 건설의 초심은 온데간데없이 국민에게 해만 끼치는 재벌도 있다.
끝까지 간직하기 어려운 게 초심이라면 최대한 오래도록 유지하는 게 절대 유리하다. 초심을 일찍 잊어버리고 모든 걸 알고 있는 양 거들먹거리면 곧장 거만하다는 평가가 돌아온다. 시쳇말로 ‘머리가 컸다’, ‘닳고 닳았다’는 건 초심을 잃었다는 소리다. 그런 낙인이 찍히는 순간부터 인생은 풀리지 않는다.
반대로 초심을 조금만 더 오래 지키면 동기들에 비해 겸손하다고 칭송받으며, 나이에 비해 열심히 산다는 격려가 돌아올 것이다.
연말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연초에 세웠던 목표들을 돌아보며 실망하기도 하고, 새로운 계획을 머릿속에 그린다. 낯선 사무실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말단 영업사원의 용기만 있으면 이루지 못할 게 무엇이 있을까? 밝아오는 새해 새 아침에, 나에게는 어떤 초심이 있었는지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