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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행위에 앞서 선서를 하는 경우가 있다. 개인의 행동이 사회 이념에 따라 움직이는 타인 혹은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어서다. 대통령 선서가 그렇고 공무원이나 전문가가 그렇다. 법정의 증인 선서도 한 예다.
이러한 선서의 사전적 의미는 '여럿 앞에서 성실할 것을 맹세하는 행위'다. 스스로의 존엄을 건 맹세를 함으로써 타인 앞에 떳떳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인간이기에 가지는 불완전함을 선서라는 행위를 통해 천명하고 가다듬기도 한다.
의사들 또한 의료인으로서 첫발을 내딛을 때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한다”며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다.
선서에는 의사에 대한 존경과 감사, 의술을 행할 때의 마음가짐, 환자 생명과 건강을 가장 중요시한다는 다짐, 어떠한 외부의 간섭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 동료와 사회에 대한 사랑 등이 담겨 있다.
하지만 명예를 걸고 존엄 앞에 선언한 말을 지키기란 쉽지 않다. 당장 옆에 있는 의사에게 “당신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꺼림 없이 지켜왔다고 자신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의술을 한 번도 행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그렇다”고 대답할 이는 없을 것이다.
신라 경문왕 귀(耳) 설화를 빗대지 않더라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와 같은 비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는 의무조차 지키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위협을 받으며 인의를 지키고, 개인 신념이나 국가 뜻에 반해 환자를 본다는 것이 쉬울까.
이에 국가와 사회는 의사들의 선서에 응답해 인류봉사라는 위업을 어떠한 꺼림이나 위협에서 벗어나 행할 수 있도록 도울 의무를 갖는다.
질병과 사고 앞에 인간은 나약할 수밖에 없고,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서는 인류를 위하는 이들이 마음 놓고 행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국가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국가가 나서서 이들의 행동을 규제하고 막는 경우들이 있다. 그 행위가 오히려 국민의 생명이나 건강에 위해를 끼친다는 이유에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의료행위를 제한하는 급여 기준이다.
“의사는 신도·기계도 아니다”
의료행위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작업이다. 따라서 새로운 행위가 도입되는 등 의료기술 발전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만약의 경우라도 섣부른 판단으로 사람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개별 환자나 임상 현장에 해당 논리를 적용하기에는 일부 무리가 있다. 더구나 절차적·제도적 한계로 인해 유일한 대안으로 거론되는 의료행위를 ‘행위기준’ 혹은 ‘급여기준’이라는 규제에 막혀 할 수 없다면 환자와 의료진, 요양기관은 고통을 감내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
실제 한 의사는 “1%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생명을 살리는 것이 의사 역할이라고 배웠다”면서 “의사는 신도 아니고 기계도 아니다. 신처럼 환자의 미래를 내다보고 생존여부를 판단할 수 없으며 정확한 기준에 맞춰 기계처럼 시술을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다. 하지만 기준은 칼 같다”고 한탄했다.
도대체 어떤 기준들이 의사들을 고뇌하고 괴롭게 할까. 대표적인 사례를 일선 의료진들에게 들어봤다.
#1. “실패하면 삭감" 기계이길 강요받는 의사
‘PTCA’로 불리는 경피적 관상동맥확장술을 비롯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정하고 보건복지부가 승인한 ‘건강보험 요양급여비용’ 기준 책자에서 ‘자-655'부터 ‘자-662’까지 경피적 혈관시술에 대한 요양급여를 인정하는 기준은 “시술 실패로 인해 관혈적 수술을 행한 경우에는 방사선 진단에 소요된 비용과 동 시술시 사용된 재료대만을 산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스탠트 삽입이나 혈관성형, 혈관내 죽종제거 등을 경피적으로 행했으나 환자의 혈관상태나 의료진의 판단착오, 실수 등으로 시술에 실패했을 경우 이미 사용된 치료재료와 진단검사 비용만을 건강보험에서 부담한다는 규정이다. 의료진의 시간과 노력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한 심장내과 전문의는 “의사도 환자도 그때 그때 상황과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면서 “기계조차 완벽할 수 없는데 기준은 100%를 요구하고 있다. 의사는 날 때부터 숙련도를 절대적 수준으로 갖고 타고나야 하느냐”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2. “환자 사망하면 삭감… 예언자이길 요구하는 기준”
삼성 이건희 회장의 생명줄로 통하는 ‘에크모(ECMO)’ 또한 급여기준을 논하며 빠질 수 없는 술기다. 에크모, 정식명칭 체외순환막형산화요법(Extra Corporeal Membrane Oxygenator)의 급여인정 기준에는 분명 적응증과 금기증이 적시돼있다.
얼핏 명확한 기준에 따라 사용한다면 고민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에크모를 써야할 상황과 세부 기준을 살펴보면 의료진의 고뇌를 일부나마 이해할 수 있다.
기준에서 정하고 있는 적응증은 ‘기존 치료법에 교정되지 않는 중증 심부전’과 ‘기존 기계적 인공호흡기 치료로 생명유지가 불가능한 중증 급성 호흡부전'이다.
반대로 금기증은 ‘이미 진행된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회복 가능성이 없는 경우’, ‘불가역적 중추신경 장애’, ‘지혈이 곤란한 출혈부위가 있어 항응고요법의 절대적 금기증에 해당하는 경우’, ‘말기암환자 등 이 시술 의의가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다.
여기서 거론되는 문제는 중증 심부전과 다발성 장기부전을 응급상황에서 정확히 판단하기 힘들다는 점과 생명의 불씨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명확한 생존가능성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부분이다. 한 마디로 보건당국은 기준을 통해 의료진들에게 정확한 예측과 인지를 요구하는 셈이다.
이와 관련, 한 흉부외과 전문의는 “일단 심장이 정지한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와 분초를 다투는 상황에서도 환자의 정확한 상태인식이 요구된다. 더구나 에크모를 써야하는 상황이라면 사망률이 90%에 육박하는데 그 가운데 생존 가능성을 따지라는 건 과학이 아니라 점성술”이라고 가슴을 쳤다.
#3. “생명 경각에 달린 환자·보호자에 행정절차 설명해야 하는 의사들”
지난해 초 ‘소두증’을 앓고 있는 한 아이의 어머니가 피켓을 들고 심평원 앞에 섰다. 아이 수술을 막고 있는 행정절차에 답답해하며 제발 수술여부를 부모가 결정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원하기 위해서다.
일명 신연기 수술로 불리는 ‘두개골 조기봉합교정술’을 받지 못할 경우 두개골이 조기에 유합돼 성장을 하며 뇌가 압박을 받아 장애나 호흡곤란에 의한 사망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행정절차가 끝나기 전까지 수술을 시행할 수 없도록 한 절차적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부모와 의료진은 고통 받는 아이들을 그저 바라봐야만 하는 상황을 1년여간 겪어야했다.
당시 1인 시위를 벌였던 안모씨는 “심평원은 심사기준만을 운운했다”며 “급여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수술을 받을 수 있게만 해달라고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서 원망 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수술에 대한 신의료기술을 신청한 병원 관계자도 “신연기수술은 두개골절제술보다 유소아의 뇌압상승을 더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낮출 수 있다”며 “경제성을 떠나 신의료기술로라도 인정을 받아 수술을 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고도 1년여가 더 지체된 지난 2월에야 신의료기술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느림보 행정을 비난했다.
政 “급여기준 일괄 정비 중” vs 醫 “과연 얼마나 될지”
이 같은 사례 외에도 의료진들이 보기에 아무런 의학적 근거가 없는 시술 횟수 제한이나 기준들이 많다. 주치의를 변경하면 무용지물이 되는 기준부터 하루라도 어기면 삭감되는 기준까지 다양하다. 심지어 실무자를 비롯해 보건복지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행정해석과 고시, 행위기준만 1600여개에 달한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해서인지 보건당국은 지난해 말 급여기준 일제정비를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후문이지만 청와대의 직접지시가 있어 강력한 동력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인지 속도가 붙고 있다. 범 의학계 전반에 걸친 의견수렴도 진행됐다.
지난 2월에는 그동안 의료계, 의학단체, 시민단체, 정부관계자들이 모여 급여기준을 개선하자며 만든 ‘워킹그룹’을 ‘급여기준개선협의체’로 공식 발족하기도 했다. 그리고 3월 10일에는 첫 회의를 갖고 의견을 취합해 향후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날 취합된 건의만 1700여건에 달했다. 더구나 복지부조차 파악하지 못한 급여기준 세부사항고시까지 합치면 3300여 항목이나 된다. 이에 협의체를 비롯해 보건당국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1년여를 예상했던 기간을 3년으로 늘려 3단계에 걸쳐 정비작업을 진행하는데 동의했다. 먼저 명확한 근거와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치 않는 사항들을 우선 정비한다는 방침이다.
이후 국민들의 불편사항과 급여기준 등 절차적 단계를 거쳐야하는 사항, 안전성 등을 따져야 하는 의견 등을 나눠 순차적으로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복지부 “오래된 기준 등 빠른 시일내 수정”
이와 관련 복지부 손영래 보험급여과장은 “처음 심평원과 복지부 내부적으로 문제의식을 가진 급여기준만 1400개 항목이었다. 그런데 1600여개 고시가 숨어있었다”면서 “94년 복지부 행정해석 등 아주 예전 기준들이 아직도 작동해 삭감이 이뤄지는 등 문제가 발생함을 인식했다. 빠른 시일 내에 수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건의된 안건 또한 1000여개는 적응증이나 산정기준 및 범위, 규모 등 급여기준 내 변경사항으로 이 부분부터 검토하게 될 것"이라며 “기존에 누락되거나 숨어있던 것들을 발굴하고 수정하는데 시일이 조금 소요됨을 양해해달라”고 당부했다.
이 같은 정부 의지를 의료계는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의료계 관계자는 “급여기준이 책자로 공표된 2000년 이후로 15년간 꾸준히 급여기준 개선을 위해 노력해왔다. 특별할 것은 없다”며 “강한 의지를 갖고 추진하는 만큼 기대는 걸어볼 것”이라고 전했다.
병원계 관계자 또한 “그간 제시한 10개 의견 중 1~2개만 반영이 될까 말까였다. 얼마나 반영 될지는 미지수”라면서도 “고쳐보겠다는데 속는 셈 치고 적극적으로 도와 최대한 민원이 줄어들 수 있도록 해보겠다”며 공감을 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려의 목소리를 전하는 이들도 있다. 한 병원장은 “사안별 특성이라는 것이 있고, 완벽한 의사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전문의를 달고 있는 이들의 전문적 시술에 숙련도를 문제 삼으며 사례별 검토라는 미명하에 삭감을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의식이 함께 이뤄져야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이야기처럼 보건당국의 급여기준 정비와 문제의식 공유가 얼마나 이뤄질 수 있을지 관심이 높다. 이에 따라 환자와 국가, 양심과 기준 사이에서 고민하는 의료진들의 고통이 어느 정도 줄어들 수 있을지 협의체 활동결과에 이목이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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