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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난생 처음으로 주방 도마 앞에 섰다. 스마트폰으로 미리 검색해 놓은 카레 레시피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감자와 당근을 차근차근 썰어 나갔다. 무딘 칼질이었지만 그럭저럭 채소와 고기들이 접시를 채워가고, 슈가보이 백선생이 개발해 전파한 특제 카레의 향이 서서히 피어나기 시작했다.
라면 하나 제 손으로 끓여먹지 않던 내가 부엌에 선 이유는 아내의 강요 때문도, 혼자 해먹어야 할 사정이 있어서도 아니다. 도대체 요리의 매력이 무엇인지 직접 느껴보기 위해서였다.
요즘 대한민국 TV는 요리 프로그램이 장악하고 있다. 최현석, 백종원 같은 인기 셰프들은 방송국 PD들의 섭외 1순위다.
방랑식객이 출연하는 ‘식사하셨어요’, ‘냉장고를 부탁해’, ‘집밥 백선생’ 등등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시청자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왜 현대인들은 요리에 열광하는가? 단순히 미남 셰프들의 음식 솜씨, 말솜씨에 반해서일까? 궁금증은 카레가 완성되면서 풀리기 시작했다.
달콤한 휴일 저녁의 휴식을 반납하고 가족이 먹을 음식을 만든다는 행위 자체가 묘한 느낌을 가져왔다. 낯선 부엌이라는 공간에서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아내와 딸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의 앵글이 무척 생소했다. 무언가 거꾸로 된 듯한 기분은 이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해주는 밥만 얻어먹은 미안함과, 내가 가족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보람, 카레 맛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우유 반 컵을 붓는 순간엔 ‘드디어 해냈다’는 뿌듯함마저 밀려들었다. ‘먹을 만하다’는 딸아이의 인색한 평가에도 벅찬 감동이 용솟음쳤음은 물론이다. 엉터리 요리사는 주제도 잊은 채 다음 주말 다른 요리를 선보이겠노라는 공약까지 내뱉고 말았다.
쉽게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만 사랑하는 가족에게 봉사하고 싶다는 내재적 갈증을 풀어주고, 완벽한 남자로서 스스로 화룡점정하는 수단이 바로 요리가 아닌 듯싶다. 요리는 이렇게 현대인들의 욕망을 채워주면서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나, 요리한 음식을 먹는 사람들 모두에게 행복을 선사한다.
TV는 이런 심리를 적확하게 파고들었다. 셰프들의 개인기에 의존하는 듯 보이지만 기저에는 현대인의 갈증과 욕망을 터치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실제로 최근 요리 열풍에 힘입어 조리기구 판매가 20%이상 증가했다는 보고가 나올 정도다.
‘먹방’ 못지않게 TV 프로그램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아이 키우기’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송국열차’에 탄 삼둥이 재롱을 보며 깔깔거린다. 하루는 아내에게 물었다. 남의 집 아이 키우는 모습이 뭐가 그리 재미있냐고. 집사람은 ‘그냥 귀여워서’라고 둘러댔지만 표정에서 다른 이유를 엿볼 수 있었다. ‘우리 아이들도 저렇게 키웠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묻어나는 게 느껴졌다.
나이 지긋한 윗세대들은 풍요롭게 자라는 요즘의 아이들이 부러울 수밖에 없고, 앞으로 자녀를 가질 젊은 층들은 완벽한 육아를 하는 부모를 롤모델 삼아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이런 이유로 슈퍼맨이 돌아왔고, 오 마이 베이비는 TV 속 주인공이 되었다.
치열한 시청률 경쟁은 현대인들의 욕망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SBS의 효자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가 ‘정글의 법칙’이다.
김병만의 캐릭터가 프로그램의 생동감을 살린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법’은 기대 이상의 대박을 터트렸다. 매주 15% 가까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젊은 층 시청자가 많아 광고주들이 선호한다. 색깔은 조금씩 다르지만 종편 방송사들에도 오지 생활, 오지 탐험류의 프로그램이 하나씩은 존재한다.
MBN의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그램들이다. 속세를 떠나 산으로 들어가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가거나, 시청자들이 도저히 접할 수 없는 세계를 보여준다. 뜻밖에 이런 프로그램들은 시청률 상위권을 차지하며 장수하고 있다.
이유가 뭘까? 역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갈증과 욕망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어렸을 적 누구나 한번쯤 꿈꾸던 세계일주의 모험을 출연자들이 대신하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산사나이는 직장과 가정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싶은 내 심연의 본능을 자극한다. 대리만족, 대리배설의 매카니즘이 시청자의 눈을 TV 화면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사실 유행을 쫓는 TV의 경망스러움은 지나칠 정도다. 방송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TV 켜기가 짜증날 정도로 비슷비슷한 프로그램들이 범람하고 있다. 하지만 욕망이 채워지고 갈증이 해소되면 시청자들은 또 다른 만족을 찾아 떠날 것이다. 앞으로 10년, 20년 뒤에는 어떤 프로그램들이 현대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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