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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잡곡 누룽지' 예찬
권은중 한겨례신문 섹션기획팀장
[ 2015년 10월 25일 22시 00분 ]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 아침 깨닫는다. 내 몸이 철저하게 한국식이라는 것을.

 

이런 평범한 진리를 일주일에 한번쯤은 깨닫는다. 술 먹고 다음날 해장을 파스타나 구운 고기로 하면 속이 탈난다. 아침의 연인인 커피도 힘들다.


젊을 때는 몰랐다. 그동안 위와 간이 묵묵히 견디어주었나 보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 나의 충복인 위와 간은 너무 지쳤다. 그리고 존재감이 없던 장과 무릎 등 온몸 구석구석이 이제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술마신 다음날 아침 비라도 내리면 내 몸 위로 코끼리가 춤을 추고 지나간 듯 온몸이 무겁다. 그걸 알면서도 술을 마시는 나의 만용과, 그리고 알코올의 중독성이 무섭다.


아무튼 몸과 마음을 수습해야 하기 때문에 아침에 어떻게든 해장을 한다. 30년 가까이 폭음을 일삼다보니 해장에는 거의 달인급 경지가 됐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해장 메뉴는 누룽지다. 얼마 전까지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백미 찹쌀 누룽지를 먹었는데 지금은 현미 잡곡 누룽지를 먹는다. 현미가 더 구수하다.


누룽지를 먹을 때마다 궁금해진다. 왜 이 밍밍하고 빈 음식이 흐트러진 내 몸과 마음을 바로잡아주는지(누룽지를 먹고 난 뒤 아내가 맷돌방식의 믹서로 갈아준 토마토와 양배추 즙으로 해장을 마무리한다. 비타민U가 풍부한 양배추가 위에 좋다며 아내가 권한다)….


내 30년 가까운 해장의 역사는 참 다양하게 채워졌다. 라면으로 10여년쯤을 버티다가 쌀국수, 잔치국수로 살짝 방향을 틀었다.


그러다 콩나물국 북어국 우거지국을 장복했다가 결국 누룽지로 정착했다. 라면으로 무려 10여년 이상을 해장했다니…. 돌이켜 생각해보면 식은땀이 절로 난다. 


어릴 적부터 나는 밥보다 국수를 좋아했다. 수제비 우동 냉면 칼국수 가리지 않고 좋아했다. 하지만 편의성 측면에서 라면을 따라올 밀가루 음식은 없었다. 고교시절 3년동안 야간자율학습 때 늘 사발면을 먹었고 대학시절에도 사발면 사랑은 이어졌다.


10대 후반부터 20대까지 내 몸의 절반 이상은 밀가루로, 그 가운데 절반은 라면으로 이뤄진 셈이다.


물론 지금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너구리 빼고(너구리의 트레이드 마크인 다시마를 사람이 일일이 넣는다는 것을 알고 너구리가 더 좋아졌다. 로봇이 인간을 쫓아내지 않는 유일한 라면이 될 듯해서다. 경영혁신은 하지 않고 인건비만 줄이는데만 눈에 불을 켜온 대한민국 현실에서 참 반가운 제품이다)


지금도 라면이 파스타 따위의 다른 밀가루 음식으로 바뀌었을 뿐 비슷하다. 사회에 나와서는 하루 세끼 가운데 두끼를 밖에서 먹는 나는 대부분 국수같은 밀가루 음식을 먹는다. 밥보다는 국수가 먹기도 편하고 맛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버섯칼국수를 먹었다. 거기에 파스타와 빵같은 서양식 정찬도 많이 접하게 된다. 이래저래 쌀보다 밀을 많이 먹는 것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쌀 소비는 급격하게 줄고 있다. 농림수산축산부의 통계를 보면, 지난 1980년 1인당 연간 쌀소비량은 132.4㎏이었으나 1990년 119.6㎏으로 줄었고 2000년에는 93.6㎏으로, 지난해에는 65.1㎏으로 줄었다.


20여년만에 쌀 소비량이 절반이상 줄어든 것이다. 이 정도면 DNA등 우리 몸의 구조가 쌀에서 밀가루에 적합하게 바뀌어야 하는 거 아닐까?


하지만 나는 현미밥에 나물반찬이 제일 몸도 마음도 편하다. 개인적으로 30년 이상 밀 중심의 식사를 하고 있지만 나의 이 보수적인 몸과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유전자가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오른다.


쌀을 열매 맺는 벼는 뿌리가 물에 잠기면 오히려 더 잘 자라는 특이한 작물이다. 논의 물에 질소를 고정해주는 조류 아나바에나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아무리 잡초라도 벼처럼 물에서는 잘 자라지 못한다. 질소비료가 20세기에 만들어졌으며 제초제 역시 현대 과학의 산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벼의 이런 생육조건은 축복에 가깝다.


따라서 동남아와 중국은 일찌감치 벼를 모판에서 논으로 옮겨심는 이앙법을 도입했다. 하지만 이는 논에 물을 댈 수 있는 관개사업이 발달해야 했다. 그러나 한반도의 조선은 유감스럽게도 관개를 주도해야할 정부가 무능했다. 잦은 정변으로 집권한 공신들에게 토지와 노비가 집중되면서 세수가 줄었기 때문이다.


양반과 노비는 세금을 내지 않았고 부역의 의무가 없었다. 세금을 낼 양인이 좀처럼 늘지 않았다. 재정이 없어 국방도 제대로 못하는 판에 관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오히려 조선 조정이 나서서 생산력이 좋다는 이앙법을 막았다. 가뭄이 들 경우 농민들이 입을 피해가 컸기 때문이다.


이앙법은 관개시설이 발달한 조선후기가 돼야 전국적으로 보급됐다. 쌀 생산량이 급격히 늘면서 농민의 자의식이 발달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서양제국주의가 중국을 덮쳤고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중국의 철저한 OEM국가였던 조선은 자신들이 문화적 속국으로 여기던 일본에게 망했다.


시간을 좀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인간이 본격적으로 곡식을 먹기 시작한 것은 불을 사용한 뒤부터로 추정된다.


사람은 불을 25만~50만년전부터 쓰기 시작했지만 자유롭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농경을 시작한 신석기시대부터인 것이 정설이다. 이 말은 곡식을 먹기 시작한 것이 1만년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쌀은 기원전 5000년쯤부터 재배됐다.


결국 내 몸이 쌀을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느끼고 반응하기 시작한 것은 고작해야 7000년전이고,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 것은 조선후기인 200~300년쯤이며 맘껏 먹기 시작한 것은 40년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쌀에 적합하게 유전자가 충분하게 발달할 수 있었을까?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유전자는 환경에 의해 변화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 후성유전학이다. 물론 변형된 유전자가 자연선택에 최적화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최적화라는 것은 ‘행복한 우연’일뿐이다.


목이 긴 기린이 나온 것은 우연이고 그 돌연변이 유전자 때문에 목이 길어진 기린들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았다. 물론 나무가 없고 풀만 있는 몽고의 초지였다면 목이 긴 기린은 멸종됐을 것이다.


우리의 몸이 우리 먹거리에 적응한 증거는 적지 않다. 우유와 고기를 먹을 수 없는 우리 조상들은 곡식과 곡식이 부족한 단백질을 콩으로 보충하는 식단에 수천년 이상 적응해왔다.


부족한 칼로리는 나물 등 야채나 물고기로 갈음했을 것이다. 식물성 음식이 많은 식단 덕분에 장은 길어졌고 덕분에 상체는 발달하고 하체는 서양인에 견줘 짧아졌다. 단백질 분해 능력도 떨어진다.     


우리가 오곡이라고 칭하는 것은 쌀 보리 조 기장 그리고 콩이다. 대부분 벼과인데 콩이 들어가 있는 게 특이하다. 콩은 4계절 변화가 심하고 건기 우기가 뚜렷해 목초지가 발달하지 않은 동북아 사람들이 소 대신 선택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대두는 다른 곡식과 달리 단백질 함량이 40%에 이른다. ‘밭에서 나는 고기’라는 별명은 괜히 붙은 게 아니다. 원산지는 바다에서 먼 만주다. 소도 물고기도 없던 만주 인근에 거주하던 사람에게는 하늘의 보살핌이라고 할 수 있다. 


오곡 가운데 우리가 지금까지 많이 접하는 것은 쌀과 콩 정도이고 보리는 맥주로 주로 섭취한다. 조와 기장은 오곡밥 외에 접할 기회가 사실상 드물다.


나는 기장을 가장 좋아한다. 노란 그 색깔도 좋지만 어릴 때 보리와 함께 가장 많이 먹었기 때문이다. 기장과 보리는 수수와 함께 가장 오래된 재배 곡식이다.  조상들은 이 오곡을 우리 몸을 이루는 핵심으로 봤다.


조선시대 고금의 의약서를 집대성한 동의보감을 보면 이렇게 나온다. “정은 기를 낳고 기는 몸을 낳는다. 그래서 양생하는 사람에게 정이 가장 중요하다. 매일 먹는 음식의 영양분이 정이 되기 때문에 곡식을 뜻하는 ‘쌀 미(米)’와 생명의 왕성함을 뜻하는 ‘푸를 청(靑)’이 합쳐져 ‘정(精)’이 된다. 정이 쇠하며 기가 쇠하고 기가 쇠하면 병이 생긴다.”


동의보감은 이 중요한 정을 키울 수 있는 음식으로 오곡을 꼽았다. “향기가 진한 음식은 정을 생기게 할 수 없고 담담한 음식만이 정을 보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음식 가운데 오곡만이 담담한 맛을 가졌기 때문에 정을 보양할 수 있다. 죽이나 밥을 끓이면 진한 즙이 흘러 모이는데 이는 쌀(오곡)의 정액이 모이는 것이다. 이것은 정을 가장 잘 생겨나게 한다.”


우리가 보통 ‘고기=힘’이라고 생각한 반면 동의보감은 ‘곡식=정’을 꼽은 것이다. 물론 고기는 커녕 피죽도 못먹던 조선시대에 곡식의 효능이 지나치게 강조됐다는 의심이 간다.


하지만 고기와 곡식을 마음껏 먹었던 왕의 수명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오곡이 고기보다 더 좋은 음식이었다는 것을.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을 정도로 고기를 즐겼다던 세종대왕은 당뇨로 눈이 멀고 53살에 사망했다. 반면 기름진 음식을 늘 경계했던 영조는 82살까지 장수했다.


동의보감에서도 양생의 조건으로 기름기 없는 음식을 강조한다(그리고 금욕도). 고기는 근육을 키우기는 좋을지는 몰라도 양생의 핵심인 정을 키우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개인적으로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중학교때 키가 작았던 나는 어머니가 키를 키우려고 우유를 엄청나게 먹인 적이 있다. 덕분에 키가 컸지만 설사가 잦았다. 우유는 나와 맞지 않았다. 지금도 데운 우유만 아주 조금 먹는다.


또 젊을 때 고기를 즐겨 먹었던 때가 있었다.  그 덕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었지만 비만수준으로 체중이 나갔고 결국 38살에 대장 용종이 생겼다.


지금은 집에서는 현미잡곡밥(영양은 없고 혈당만 높이는 흰쌀은 섞지 않는다. 조상들은 흰쌀보다는 현미를 먹었을 것이다)과 된장찌개와 제철 야채를 즐겨 먹는다. 


고기는 아예 먹지 않고 흰살 생선과 패류를 가끔 먹는다. 이렇게 먹으면 운동을 많이 하지 않아도 적정 체중을 유지할 수 있다. 섭취한 칼로리보다 더 많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성인의 하루 권장 칼로리는 2100kcal~2500kcal다(성별과 나이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우리나라 사람의 1일 평균섭취 칼로리는 3056kcal에 이른다.


회식이 잦은 성인 남성의 칼로리는 아마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나도 외식이 잦은 주중에는 체중이 늘다가 집밥을 먹는 주말에는 체중이 다시 돌아온다.


사람들의 몸이 현미 잡곡에 적응한 나와 같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미 빵에 혹은 우리쌀과 다른 길고 푸석한 인디카쌀로 만든 쌀국수에 적응했을지도 모른다.


유전자의 변화는 꼭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환경 오염에 따른 유전자의 변형이 얼마나 끔찍한 질병을 가져오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런 변형을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는 차분한 삶과 음식뿐이다.


하지만 현실은 오로지 속도와 효율만 강조한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피폐해지고 음식은 그저 충전을 위한 배터리쯤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공교육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청량음료 판매를 금지하고 운동을 더 많이 시키려고 하고 있다. 트랜스 지방과 육류 섭취를 줄이려는 급식 개혁도 시도중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다. 학교에서 의미도 모른 체 미분 적분을 주입하는 것보다 내 몸의 소리를 듣는 법을 가르치면 안될까?


나도 이런 교육을 받았다면 내 삶은 조금 더 건강해지고 풍요로워졌을 것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누구도 내게 마가린이 몸에 좋지 않으며 액상과당이 설탕보다 더 나쁘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술을 마신 다음날 아침마다 만나는 현미잡곡 누룽지는 푸석푸석하고 보잘 것 없는 몰골의 내게 말한다.


“날 만난 건 행운이야.” 듣기에는 건방진 말일 수 있겠지만, 몇십조에 이르는 사교육 시장은 활황이어도 건강한 음식에 대한 교육은 전무한 우리나라에서 라면도 아닌 현미잡곡 누룽지로 해장을 하고 있는 나는 그저 ‘행복한 우연’에 감사할 따름이다. “고맙다. 누룽지야.”

데일리메디 webmaster@daily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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