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몸을 추슬러야 할 시간인데 간호사는 계속 기다리라고만 했다. 수면마취제 약발이 제대로 서지 않았는지 대장내시경 내내 배가 터질듯 고통이 이어졌다. 암 덩어리라도 발견된 것인가? 약 기운에 머릿속은 혼미해도 걱정의 시계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대장 속에서 찾아낸 용종 네 개 가운데 두 개가 문제였다. 크기도 1㎝가 넘고 대장 깊숙한 곳, 장이 꺾어지는 부분에 자리 잡아 떼 낼 수가 없다는 거다. 졸지에 응급환자가 된 나는 휠체어와 앰뷸런스를 타고 건진 센터에서 본원으로 이송됐다. 본원 소화기내과에서도 여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검진 담당 여의사에게 한차례 엉덩이를 공개한 터라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나 더 급한 게 있었다. 잦은 음주로 수면 마취가 잘 안 되는 내 신체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다시 통사정을 해 본다. “아까도 내시경 도중에 깨어나서 괴로웠는데 약을 조금 더 써주시면 안될까요?” 차트를 살펴보던 의사는 단호히 안 된다고 했다. 첫 수면 때 이미 정상인의 1.5배 마취제를 투여했으며 양을 더 늘리는 것은 호흡 중추를 마비시킬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숨을 못 쉰다. 그러면 죽을 수도 있는 건가’ 뿐만 아니라 마취가 잘 안 될 거라는 비보도 들려주었다. 앞서 잠 깨는 약을 썼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두 번째 마취는 잘 안 될 수 있다는 거다. 거의 자포자기 상태로 엉덩이를 여의사의 가슴 앞으로 내밀었다. 무릎 굽힌 엉거주춤 내시경 자세는 이미 연습까지 한 만큼 수준급이었다. 이제 수치심만 접으면 그만이다.
대장 구석구석을 떼 내고 긁어냈으니 장출혈이 생기는 건 당연해 보였다. 입원 처분이 내려졌다. 오후의 중요한 회의와 송년회 자리가 단박에 날아갔다. 수속을 마친 뒤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병상에 누우니 중환자가 따로 없었다. 하루 종일 송곳 같은 내시경과 씨름하며 탈진상태에 접어들었는데 물도 마시지 말란다. 비타민이 들어간 링거 주사는 왜 이리 손등 핏줄을 아리게 만드는지, 잠이 들 만하면 간호사가 찾아와 대변 보셨냐고 묻는 것도 고역이다.
잔뜩 골이 나 쏘아붙였다. “먹은 게 있어야 뭐가 나올 것 아닙니까” 장출혈을 체크하려는 간호사에게 무슨 잘못이 있으랴. 미안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다음날 피검사를 통해 헤모글로빈 수치를 확인하고서야 퇴원 통보를 받았다. 대장 속 출혈이 멎은 것이다. 내 몸 속에서 떼 낸 게 무엇인지는 일주일 뒤에 알 수 있다고 했다. 위도 염증이 심하고 폭포모양으로 변형돼 있으니 술 마시지 말라는 당부도 이어졌다. 최소 2주일은 절대 금주하고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라는데 남은 송년회와 술자리는 어찌하란 말인가?
적어도 나와 비슷하게 사는 40대~50대 남성이라면 대부분 건강검진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일에는 일대로 치이면서 한국적 회식문화, 음주문화에 몸뚱이는 닳고 닳는다. 돌이켜보면 20여년 직장생활을 하면서 마감시한에 쫓겨 건강검진을 받은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심지어 12월 31일에 술이 덜 깬 몸으로 건진 센터를 찾은 적도 두어 번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방송사만 그런지 알 수 없으나 60% 가까운 직원들이 12월에 검진을 받는다. 용감한 몇몇은 일부러 연달아 술자리를 갖고 몸 상태를 최악으로 만든 뒤 검진대에 눕는다. 그래서 별일이 없어야 진짜 몸에 이상이 없는 거라 믿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1년간의 무절제했던 생활에 대해 ‘의학적 면죄부’를 받으면 다시 곡예운전 같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야근한 다음날이면 어떠랴, 며칠씩 이어지면 어떠랴, 회식과 술자리에 빠질 수는 없다.
어쩌면 나는 강박증을 앓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그날 저녁 입원실에 몸을 누이고도 온통 그 시간에 갔어야 할 송년회 자리 생각뿐이었다. 이 아까운 시간에 여기 이렇게 누워 있다니 낙오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병실 창에 걸려있는 초승달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살아온 방식과 태도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항상 가족과 건강은 뒷전에 두고 성취와 욕망만 쫓아온 지난날이 보이기 시작했다. 달력에 약속이 채워지지 않았거나 저녁에 바로 귀가하는 날이면 화가 치밀었다. 스마트폰에 입력된 2천5백여 개 전화번호는 내가 잘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믿도록 강요하는 강력한 물증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치욕은 내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한 어리석음, 영원한 건강을 자신했던 오만함을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었다. 지금껏 껍데기뿐인 화려함과 분주함에 마취돼 살아온 것이다. 이제 새해가 밝아온다. 지천명을 눈앞에 둔 40대의 끝자락에서 뜻밖에 건강검진이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해준 건 크나큰 행운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