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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의 자산은 노스님과 노목(老木)”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조직이든 사람과 그 사람들이 빚어내는 아우라가 핵심 가치라는 뜻일 것이다. 신문사도 비슷하다. 신문사는 다른 제조업과 달리 윤전기를 빼면 장치가 별로 없다. 한마디로 사람 장사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우리 사회의 대세이지만 신문사가 비교적 이 쓰나미에서 벗어나 있는 이유기도 하다.
어느 나라나 근대화 이후 가난하지만 삐딱한 중산층의 젊은이들이 신문사를 지원했다. 격동기에는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변화와 혁신을 꿈꾼다. 80년대 학번인 나도 그랬고 내 또래 선후배 모두 비슷한 동기로 언론계에 문을 두드렸다. 그래서일까? 신문사에는 자기만의 세계를 꿈꾸는 괴짜가 많다.
얼마전 30대 후배가 아파트에서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모두들 아파트를 선망한다는 점을 볼 때 그 후배는 괴짜다. 거기다 기존 도시의 가치를 새롭게 이어가는 도시재생 분야에 관심이 많다.
후배는 직접 집을 설계해서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옛날 집을 리모델링했다. 변기 냄새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변기를 뜯어서 관을 연결하는 장치인 플랜지를 교체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변기를 고치는 과정은 페이스북으로 중계됐고 선후배의 응원이 답지했다.
12월초 드디어 집들이를 한다고 해 가보았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사러가 쇼핑 근처 쌀집 골목으로 쭉 들어가면 나오는 언덕 위 파란 철대문집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잔디밭에 감나무 두 그루와 뒷산에서 밀려오는 마른 풀내음까지. ‘응답하라 1988’ 세트장을 찾은 느낌이었다. 아파트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따뜻한 기운이 확 끼쳤다.
집안 구조도 바깥 풍광만큼이나 관심을 끌었다. 안방을 터서 주방을 만들었고 침대가 있을 자리에 4인용 원목 식탁을 가져다 놓았다. 남향인 식탁 너머 큰 창으로는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네 살 딸을 위해 이사온 집이라고 했다. 딸아이는 아직 존댓말의 개념을 몰랐다. 맨처음에는 낯을 가리더니 자꾸 내게 와서 “안아줘”라고 말했다(이놈의 인기!). 덕분에 술자리에서 빠져 꼬마 아가씨를 안고 그 집 구석구석을 좀더 들여다보게 됐다. 찬찬히 본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그 집은 주방을 위한 집이었다. 후배는 왜 주방을 안방으로 모셨을까?
아파트가 고향이자 주거의 기준처럼 돼 버린 요즘, 집들의 중심은 거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현관을 들어가면 넓은 거실이 나오고 주방은 그 거실의 부속품에 그친다. 가스레인지와 냉장고, 김치냉장고가 차지한 공간을 빼면 주방은 거실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집의 거실이 남향이고 주방이 북향이라는 점에서 주방의 지위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거실은 허위의 공간이다. 거실은 사실상 대화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죽은 공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거실이 남편이나 아내가 책이나 신문을 읽는 공간이라는 생각도 착각이다. 우리나라는 성인들이 1년에 책 한 권을 읽지 않는 독서후진국이다. 차라리 주말에 남편이 하루종일 소파에 붙어 있는 게으름의 현장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그러나 주방은 다르다. 주방(특히 식탁은)은 매일매일 하루에 3번씩 끼니가 펼쳐지며 파편화된 현대인들이 잠시나마 가족의 안부를 묻는 공간이다. 물론 대화가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다. 그나마 침묵하는 무관심보다는 다툼이 낫다. 즐겁고 기쁜 소식은 물론이고 슬프고 비통한 소식도 대부분 식탁에서 이루어진다. 거실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권위의 공간이라면 식탁은 살아 꿈틀 거리는 집안의 광장에 비유할 수 있다.
이런 주방은 왜 찬밥 취급을 받아왔을까.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우리나라 여성의 낮은 사회적 지위 탓이다. 우리나라 여성의 지위는 선진국 클럽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다. 여성의 정치권 진출 정도를 나타내는 지수는 아프리카 국가에도 못미치는 100위권 후반대다. 아프리카를 비롯한 후진국들조차 여성의 정치 참여를 법으로 보장해놓았기 때문이다.
여성의 낮은 지위는 여성의 고유하며 위대한 권리와 의무를 폄하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가사노동은 물론 임신 출산 육아가 갖는 생물학적 사회학적 의미를 갉아먹기 위해 우리 사회는 노력해온 것처럼 보인다. 임신 출산 육아는 모두 개인 부담이었고 국가는 나몰라라였다.
직장인 기업 역시 이를 외면해 왔다. 결혼을 했다고 퇴학시키는 대학도 있었다. 덕분에 우리나라는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자랑하고 있다. 경직된 사회에서 여성의 공간인 주방을 제대로 대접할리 만무하다. 그저 문밖 아궁이가 집안의 가스레인지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게 주방이 찬밥인 핵심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제 세상이 바뀌고 있다. 남학생의 엄마들이 여학생들이 무서워서 자기 아들을 남녀공학 보내는 것을 꺼린다. 필기시험만 보면 대부분의 시험에서 여성들이 남성을 압도한다. 9급 공무원 시험은 물론이고 고위직을 뽑는 고시도 마찬가지다. 남성 문화가 짙은 신문사 역시 여성에 견줘 성적이 떨어지는 남성 지원자들 때문에 고민한 게 꽤 오래전 일이다.
전쟁과 농경이 의미가 축소된 지금, 힘쓰는 일보다 머리를 쓰거나 감성적 접근을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졌다. 여성도 남성에 견줘 뒤지지 않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나면서 여성 자립이 가능해졌고 남자와 결혼하는 것보다 혼자 사는 것을 선택하는 여성인구가 늘고 있다. 그러나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지위 향상만으로는 북향의 조그맣던 주방이 안방까지 차지하고 있는지는 아직 설명이 되지 않는다.
요즘 대세인 먹방은 주방의 전진배치의 이유를 좀더 확실하게 설명해준다. 표면적으로 먹방이 늘어나는 것은 1인가구의 증가와 밀접하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서울시 1인가구는 1980년 8만2400가구에 그쳤지만 2010년에는 85만4600가구로 10배 이상 늘었다. 전체 가구의 24%다. 통계청은 이런 1인가구가 2030년에는 무려 전체 가구의 61%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혼자 사는 가구의 가장 큰 고민은 끼니다. 집에서 나와 자취를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삼시세끼는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이다. 아무리 맛난 음식도 사흘을 연달아 먹을 수 없다. 계속해서 메뉴를 바꿔야 한다.
또 밥을 먹는데 필요한 김치를 비롯한 핵심적인 밑반찬을 장만해야 한다. 하지만 7시에 출근해서 11시에 퇴근하는 한국의 노동 강도에서 이런 상차림은 전업주부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음식 사업가인 백종원씨가 인기를 끄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백씨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장면을 보여주는 ‘먹방’을 요리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쿡방’으로 바꾼 분수령이 됐다. 어느 나라나 음식방송은 맨 처음에는 먹방으로 출발한다. 연예인을 출연시켜 온갖 산해진미를 소개하고 먹는 것을 보여줬다. 적은 제작비에 비교적 높은 시청률을 보장해주는 안전한 방송 제작 방식이다. 이런 산해진미를 연신 감탄사를 날리며 흡입하는 모습이 마치 마구잡이로 성욕을 배설하는 포르노를 연상케 한다고 ‘음식포로노’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러나 지나친 자극의 감흥은 짧은 법. 그래서 먹방 대신 쿡방이 뜬다. 맨처음에는 주로 프로 쉐프들의 현란한 요리 대결이 나왔지만 복잡하고 호화로운 요리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끌지 못했다. 프랑스어나 한문따위를 써가면서 왕이나 귀족이 먹을 법한 산해진미 요리의 소개에 시청자들이 식상해진 것이다.
그 무렵 백종원씨가 등장했다. 외식기업 대표인 그의 요리 방법은 매우 손쉬우며 통속적이기까지 하다. ‘짜고 맵고 달게’라는 외식요리의 기본 공식을 그대로 따라간다. 건강하고 담백한 맛에 대한 고민이 없어도 대중들은 환호했다. 복잡한 수학공식을 유도하는 원리를 가르치려는 수학 선생님보다는 각종 편법으로 문제를 맞추게 하는 학원 강사가 더 각광받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요리하는 남자에 대한 환상도 여기서 나온다. 복잡한 정식 요리를 원하는 게 아니라 편법이라도 그럴 듯한 요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부각됐다. 요리는 장미꽃과 반지와 같이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장식품처럼 취급된다. 요리는 이런 장식품을 마련해줄 또하나의 ‘스펙’처럼 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손쉽다고 해도 이런 레시피도 따라할 여유가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음식은 1인분만 하기가 매우 어렵다. 게다가 아무리 설탕과 간장을 쏟아 넣어도 음식을 맛나게 하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외식업체가 MSG의 유혹에 굴복하는 이유다. 결국 쿡방 역시 먹방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환상이다. 쉬운 요리도 귀찮아 짧은 시간 싼 가격으로 배달이 되는 음식점을 알려주는 배달앱마저 인기다.
이처럼 대중들은 현실보다는 환상에 사는 것에 익숙하다.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브랜드 커피숍의 소비에서도 이런 패턴이 확인된다. 다른 커피숍은 텅텅 비어도 ‘스벅’은 늘 만원이다. 일부 음료의 가격은 밥한끼 값에 육박하는 이 커피숍의 인기 비결은 뭘까?
스타벅스에 가는 사람은 커피가 아니라 이미지를 구매하는 것이다. 스타벅스 커피는 커피전문점에 견줘 맛이 그렇게 훌륭하지 않다. 에티오피아 커피의 산미나 과테말라 커피의 화끈함이 전혀 없다. 스타벅스 인기의 비밀은 커피맛이 아니라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똑같은 매장의 인테리어와 분위기다.
서울의 높은 집값을 감안할 때 넓고 쾌적한 자기 집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이런 대중들은 넓고 고급스러운 그것도 미국 브랜드인 스타벅스에서 미국식 공간이 주는 이미지를 마시는 것이다.
환상은 언제나 증폭되기 마련이다. 덕분에 외식산업은 점점 고급스러워지고 있다. 화이트 트러플(유럽산 고급 버섯의 종류)을 넣은 20만원짜리 햄버거처럼 몇십만원짜리 코스 요리가 생겨나고 이름도 생경한 외국 음식들이 여기저기서 등장한다. 음식의 소비를 일종의 권력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러다가 비빔밥이나 멸치국수 앞에도 프랑스의 정관사인 'le'나 이탈리아 정관사인 'il'이 붙을까 두렵다. 전국 어디든 맛집을 찾아 헤매겠다는 미식 노마드(유목민)를 자처한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들을 꾀는 광고성 포스팅도 인터넷에 범람한다.
이런 측면에서 먹방·쿡방과 브랜드 커피숍의 강력한 경쟁 상대는 음식이 아니라 게임이다. 게임은 팍팍한 현실 속에서 탈출구로 가장 손쉽게 접할 수 있는 환상이다. 그래서 요즘 게임 광고가 부쩍 눈에 띈다.
포털 페이지나 텔레비전은 온통 게임 광고 천지다. 무기력한 현실과 달리 아이템만 있으면 자유자재로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존재로 변신할 수 있는 게임의 유혹은 보는 것에 그치는 먹방보다 더 달콤하다. 그래서 게임중독의 끝은 배달앱이나 삼각김밥으로 끝나는 먹방보다 더 허탈하다.
진짜이어야 할 우리 일상 곳곳은 환상으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직접 집에서 하는 음식은 고향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처럼 귀할 수밖에 없다. 먹방은 얼마든지 인터넷으로 다시 보기를 할 수 있지만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삼시 세끼는 늘 라이브다. 라이브의 본방사수 여부가 내 건강과 함께 내 영혼을 살찌운다. 그 본방이 바로 우리집 주방에서 매일 최소 한번은 펼쳐진다.
현실인 요리는 가상의 게임과는 다르다. 요리를 하기 위해서는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해 음식을 하고 뒷정리를 해야 하는 장시간의 노동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궂은 일이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화려한 음식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매일매일 먹을 수 없다. 진짜 요리는 화려한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소소하다. 맞벌이에 집안일에 치이는 아내의 화장안한 얼굴처럼 말이다.
평범 속의 비범을 추구하는 겸손함이 요리의 본질이다. 이런 겸손함은 많은 경영서적에서 말해온 리더십의 요체를 닮았다. 주방에서 오래 머무는 사람이 가정뿐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리더가 되기 쉽다. 요리를 하는 사람은 누군가의 홀로됨을 치유하고 영혼에 향유를 뿌려주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집안에서 발언권이 세지는 것도 주방의 힘 덕분이 아닐까?
주방이 집안 한 가운데로 오는 것은 요리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주방의 전진배치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그 속도도 빨라질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