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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치는 것은 봄으로 온다
너는 그렇게만 알아라
- 이병률 <음력 삼월의 눈>
겨울은 지났다. 너도 그렇게 함께 떠났다. 겨울의 기억은 전부가 이별이다. 옷 속으로 파고드는 축축한 바람이었는지 모른다. 네가 가고 ‘먹먹했던 고통’ 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저 몸을 떨게 하는 추위였을 것이라 정리한다.
바람이 가벼운데 파묻혀 움츠릴 수는 없다. 바뀐 바람으로 몸은 그렇게 먼저 봄을 맞는다. 계절은 공정한 심판처럼 봄을 알린다. 마음은 아직 짙은 기억으로 무겁다. 그러나 또한 그래서 ‘사무치는 것은 봄으로 온다’
봄은 밤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몇생을 돌다가 와 어느 봄밤 다시 만날까요
- 권대웅 <아득한 한뼘>
헤어질 수나 있었을까? 차라리 덤덤했을 것이다. 헤어짐은 1부의 만남과 2부의 재회를 내용으로 하는 뮤지컬, 그 사이를 채워주는 인터미션 같은 것이었다.
하나의 생이 한 번의 탑돌이라면, 몇 번의 탑돌이를 하고 난, 그렇게 다시 2부가 시작하려는 시간, 다시 만나는 그 날은 어느 봄날이 좋겠고, 그 때는 그 봄날의 어느 밤이 적당하겠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가 아닌 ‘어느 봄밤에 다시 만날까요’ ? 시는 재회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재회에 대한 청유이고 확신이다.
봄은 꽃이다.
江上被花惱不徹 (강상피화뇌불철)
無處告訴只顚狂 (무처고소지전광)
- 江畔獨步花 <강반독보심화>中 - 杜甫
강둑이 온통 꽃이다. 형형색색. 가슴이 답답해 터질 듯하다. 이 마음 말할 데 없어 미치겠구나.
뒤의 두 구(句)는 이렇게 이어진다. ‘이 마음 술 한 잔에 달래려 아랫 마을 친구를 찾아 나서는데 / 그 친구 이미 집을 비운 지 오래다’ 시를 쓸 때 두보 50이다.
나이 쉰에도 꽃이 좋아 마음을 다독이기 쉽지 않으니 그저 시인의 심성이어서 그리한 것일까? 봄으로 발산하는 에너지로 꽃은 피어난다. 그 꽃으로 시인은 시를 쓴다. 술꾼은 술을 먹는다. 씨앗은 또 열매가 된다. 폭발하는 봄 앞에 나이는 그저 무색하다.
그러므로 봄은, 도전이고 대쉬(dash)다.
붉은 바위 끝에 (부인께서) 암소 잡은 (나의) 손을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겠습니다.
- 헌화가 (獻花歌) -
“누구 나에게 저 꽃을 따다 줄 사람 있겠습니까?”
꽃은 철쭉이렸다. 철쭉은 절벽에 매달려 탐스럽다. 여자는 쉽게 물으나 감히 나서는 이가 없다. 목숨을 걸어야 할 부탁을 쉽게 던지는 건 여자다.
공정치 못한 게임이지만 선뜻 나서지 못함에 수하의 남자들 얼굴이 어둡다. 소 끄는 노인이 그 앞을 지난다. 노인은 그러나 선뜻 용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감히 제가…” 묻고 난 뒤에야 -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 노인은 꽃을 꺾어낸다. 연모의 힘인가? 꽃의 힘이고 봄의 힘이다. 봄이 노인의 부끄러움도 잠시 놓게 하였다. 봄은 힘이 세다.
그럼에도 방종하지 말 것. ‘경계(警戒)의 봄’이다.
今日花前飮 (금일화전음) / 甘心醉數杯 (감심취수배)
/但愁花有語 (단수화유어) / 不爲老人開 (불위노인개)
- <음주간모란(飮酒看牡丹)> 유우석
‘꽃 속에서 술잔 꺾으니 / 좋도다. 그리하여 여러 잔에 취했는데 / 그러나 꽃은 “노인을 위해 핀 것은 아니오” 라 하는 듯’ 흥은 깨졌다. 정신이 번쩍 든다. 팔자 좋게 늘어져 잔 뒤 ‘내가 나비의 꿈을 꾸었는가, 나비가 나의 꿈을 꾸었는가’ 같은 춘몽은 애당초 설 곳이 없다.
시인은 박하게 스스로를 조소(嘲笑)한다. 사무침이니 꽃이니 도전이니가 다 무어냐? 정신줄 놓고 한눈 팔다간 어디서 무슨 꼴사나운 창피를 당할지 모를 일이다.
많이 기다렸다. 봄이 반갑지 않느냐고 연신 주위에 묻는다. 주위의 봄은 다 내가 전했다. 그럼에도. 겨울이 막차를 거두어 냈을 때부터였다.
곧 서부간선도로 옆 방둑에 개나리가 샛노랗겠구나 기대하기에도 앞서 달뜨지 말아야지, 가볍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이 먼저였다. 그리하여 또한 이른 봄밤 함께 마신 친구들한테 뜬금없이 “봄이다. 경계하여라” 라는 문자까지 전하는 일도 생겼다.
아직 쉰도 되지 못한 나이에 웬 철 없는 소리인가 하려마는 수십 번 봄을 맞고 또 보내고 살았음에도 여전한 부끄러움, 내 힘으로 밥 벌어 먹고 산 만큼의 무게도 감당치 않으려는 주저함과 피해감. 그 앞에서 봄은 없어야 한다. 봄을 관조하며 봄을 경계한다.
<p.s>
그러나 순정한 꽃 한 송이 피워야 할 봄날이다.
부치지 못한 편지 묵혀도 좋을 봄날이다.
이대로 늙으면 또 어떠냐, 낙화유수(落花流水) 봄이다
-<봄날은 간다> - 박시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