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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을 연상시키는 통유리창의 암센터 건물이나 각 층마다 대리석으로 깔린 병원 복도는 아니었지만 세월의 더께만큼 이 병원에는 지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과 인생이 깃들어있기에 충분했다. 비록 빛은 많이 바랬지만 고스란히 예전의 숨결이 녹아 있었고 지금도 환자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살아있다. 전라남도 여천전남병원 정웅길 원장이다.
미나리밭 이었던 여천지역···“환자 후송 도중 안타까운 일 벌어져”
정웅길 원장이 미국에서 공부를 할 때였다. 1970년대 월남전이 벌어지던 당시 상황은 긴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일반외과 전문의를 획득한 그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자 주변인들 모두 하나같이 말렸다. 위험천만한 곳에 왜 다시 발걸음을 옮기냐는 의미였다.
그러던 중 당시 한 가족이 정 원장의 뇌리에 스쳤다. 정 원장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동네 사람들과 때론 부모님처럼, 때론 친구처럼 동고동락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도 환자들 옆에서 기쁜 일, 슬픈 일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그런 의사를 꿈꿨었다”고 말했다.
1979년 비로소 미국을 떠난 정웅길 원장. 올해로 36년여가 흘렀다. 한국에서 환자들과의 본격적인 ‘만남’은 1983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여천지역은 미나리밭 일대로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그 때만 해도 여수 지역에서는 종합병원이 없었고 행여 중환자가 발생해도 즉각적인 치료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안타까운 일이 속출했다. 정 원장은 “서울은커녕 광주광역시로 환자를 이송하는 도중에 아깝게 목숨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잇따랐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보다 못한 선친께서 결국 본인을 포함해 자식들이 고향에 뿌리 내리고 의료봉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문했다. 진정으로 환자들을 보살피라는 당부였던 셈”이라고 회고했다.
실제 故정명민 박사의 뜻에 따라 정웅길 원장을 포함해 7남매 모두 지역 내에서 의료인으로 활동 중이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서울에 내로라하는 병원들을 포함해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도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중대형 병원들이 속속 출현했다.
그럴 때마다 정웅길 원장의 적극적인 마인드는 지금의 여천전남병원을 존재하게 했고 깊은 뿌리가 됐다.
“모든 병원이 ‘빅5’ 될 수 없지만 최적 의료서비스 제공 총력”
국민들의 눈높이가 높아진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고급스럽게 무장한 식당, 호텔, 백화점 등이 대표적인 예다.
정 원장은 “대한민국 의료기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병원이 ‘빅5’를 표방하는 것은 맞지 않다. 수요와 공급 원칙에 따라 환자 한 명, 한 명에 충실하다 보면 의사들의 노력이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본다”고 소신을 피력했다.
그 가운데 정 원장은 “대규모 증축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리모델링도 하고 장비도 최첨단으로 구비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였다”며 “지역민들 입장에서 ‘이 병원에 오면 관리가 가능하다’라는 신뢰를 주고 싶었다”고 힘줘 말
했다.
환자들에게 병원 ‘문턱’을 낮추고자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드웨어적인 면에서 의료혜택을 덜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얘기는 의미하는 바가 남다르다.
정 원장 “종합병원이지만 대학병원급의 장비를 갖추고 환자들에게 최상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라며 “도시바메디칼시스템즈의 CT, X-ray, MR, 초음파 기기 등 장비 투자에 지원을 아끼
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환자 눈높이 맞추기 위한 ‘노력’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 보통 외과의라면 벌써 칼을 놓았겠지만 정웅길 원장은 아직도 활기차다. “그는 진짜 프로다. 외과의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그저 묵묵히 앞만 보면서 페달을 돌리고 또 돌리면서 길을 재촉한다.” 정웅길 원장을 바라보는 한결같은 시선이다.
그러던 중 그가 나지막이 “한국의 의료가 너무나 삭막해 져버렸다”고 털어놨다. 여기에는 현재 한국의 의료 시스템에 대한 문제점으로 직결된다.
정 원장은 “저수가와 왜곡된 시스템 하에서 환자 진료에 단, 1분도 걸리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다”고 짚었다. 그렇다면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그는 “의료수가가 워낙 싸다보니 병원을 경영하는 병원장들의 경우 1인 3역을 해내는 경우가 다반사다. 외래진료도 해야 하고 대외적인 활동, 교육에도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여기에 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야 한다”고 짚었다.
외과의사가 된 수십 년 전부터 지금까지 역사적 굴곡과 사건들이 많았지만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던 삶의 모습이다. 외길을 걸어 온 老의사의 뚝심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그가 ‘현역’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 자신의 오랜 경험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에게 자신이 좀 더 쓰여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면서 정 원장은 “현재의 여천전남병원이 이토록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은 환자들의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정을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한 직원들의 노력도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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