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이 겪는 불편이나 필요에 공감하고 잠재적 욕구를 파악해 제품개발 단계부터 디자인을 적용하는 것을 뜻하는 ‘디자인적 사고’는 정밀한 수술이 이뤄지는 의료기관과는 거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예상하지 못한 것이 상상 이상의 효과를 거둔다.
미국 메이요클리닉은 디자인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파괴적 혁신 전략’을 통해 의사와 환자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병원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다.
메이요클리닉은 철저한 관찰과 실험을 통해 의사와 환자가 소파에 앉아 서로 마주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진료실 환경을 개선했다.
이는 기존의 진료실이 컴퓨터 모니터만 바라보는 의사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있는 환자가 제대로 된 소통을 할 수 없었던 의료현장의 고충을 반영한 결과다.
이렇게 환자가 의료기관에서 경험하는 고충을 파악해 개선하는 ‘환자경험관리’가 병원 경영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국내 의료기관들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환자경험을 분석, 관리하고 있다.
기존 고객만족도(CS)에 무게를 뒀던 데서 나아가 환자와의 장기적인 신뢰 관계를 위해 ‘환자경험관리’를 실현하고 있는 의료기관들의 혁신 사례를 살펴봤다.
‘헬스케어→ 휴먼케어’ 진화, 세브란스병원 창의센터
세브란스병원은 2013년 김진영 센터장(연세의대 의학교육과)을 중심으로 창의센터를 설립하고 간호국, 물품관리팀 등 현장부서와 공동으로 환자경험관리를 시행 중이다.
센터는 Cure에서 Care, 헬스케어에서 휴먼케어, 품질에서 품격, No.1에서 Only.1이라는 네 가지 모토를 기반으로 환자와 가족, 방문객들과의 벽없는 소통을 해오고 있다.
나아가서는 그들이 병원 이용을 편리하게 하고 스스로 존중받고 있는 존재라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이러한 목표가 실현된 대표적 사례가 ‘청소시스템’이다. 병원 내 기존 청소시스템이 가진 문제점은 감염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병원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을 닦은 걸레로 다른 사물을 닦는 등 기존 청소 패턴은 병원 내 감염을 오히려 증가시킬 수 있었다.
이에 센터는 병원을 공공장소와 엘리베이터, 병실과 화장실 이렇게 네 구역으로 분류한 후 공간마다 각각의 매뉴얼을 만들어 적용, 병원 내 감염을 사전에 방지했다.
최근에는 침대를 통해 수술실로 이동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민망하다는 환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해 일정 거리까지 환자가 수술실로 걸어갈 수 있도록 개선했다.
이를 통해 신체적인 불편함은 증가할 수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안정을 도모해서 97~98%에 달하는 환자 만족도를 이끌어냈다.
김진영 센터장은 “앞으로도 환자가 병원에 예약하기 이전 단계부터 퇴원하고 나서 그 후 단계까지 환자경험관리 범위를 넓힐 계획”이라고 말했다.
‘아이디어 AMC’ 혁신, 서울아산병원 이노베이션디자인센터
서울아산병원은 지난 2013년 서울대 원자핵공학박사 출신인 김재학 센터장을 필두로 이노베이션 디자인센터(이하 센터)를 설립해 환자중심 서비스를 디자인하고 있다.
센터는 ‘아이디어 AMC’를 통해 병원 및 센터 직원들이 팀을 구성해 환자 및 내원객이 느끼는 불편함을 파악하고 맞춤형 솔루션을 도출하고 있다.
이를 통해 환자들이 가장 큰 공포감을 느끼는 수술실 서비스를 설계하기도 했다. 수술실 환자 경험을 토대로 수술에 대한 정보와 과정 등을 웹사이트와 동영상으로 제작해 환자의 불안감을 덜어줬다.
비뇨기과 파일럿 테스트 결과 85%의 환자가 수술 前 불안감을 줄이는 데 도움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소아 환자의 경우 CT 촬영 등을 할 때 촬영기계에 우주선 그림을 붙이거나 미션카드를 제공해 마치 게임을 하는 듯한 분위기를 형성한 후 편안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최근에는 계단 걷기 앱인 ‘계단 N’을 배포하고 엘리베이터 내 혼잡도를 최소화하기 위해 직원들을 대상으로 계단 걷기 캠페인을 펼쳤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환자를 위해 엘리베이터 이용을 양보토록 하는 동시에 직원들 스스로도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김재학 센터장은 “그간 의료기관들이 의료적인 성과에만 집중했는데 환자와 가족들이 느끼는 신체적, 정신적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김 센터장은 “아이디어 AMC를 통해 올해도 20여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고 앞으로 더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공공의료’ 차별화, 서울의료원 시민공감서비스디자인센터
서울의료원은 시민공감서비스디자인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앞서 소개된 센터들과 달리 전문의인 김현정 교수(피부과)를 센터장으로 두고 있다.
환자 관점과 의료진의 입장을 함께 이해하고 공감하는 ‘이해의 디자인’을 목표로 하고 있는 디자인센터는 디자인, 보건, 경영,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을 자문위원으로 구성했다.
센터는 4D(Discover·Define·Develop·Deliver) 단계를 거쳐 병원 내 환자, 가족 및 방문객들의 불만을 파악하고 적절한 솔루션을 적용하고 있다.
센터는 기존 번호표 키오스크가 중앙 기둥에만 집중돼 접수 대기환자의 비율이 높다는 것을 파악, 번호표 키오스크를 좌측 및 우측 등 분배 배치했다.
그 결과 번호표 발행 후 대기 인원수가 동시간대 평균 30명 수준으로 감소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최근 센터는 환자들의 가장 큰 불만으로 꼽히는 병원 내부에서 길을 찾기 어렵다는 불만도 ‘위치인지 프로젝트’를 통해 손을 볼 계획이다.
심리학자뿐만 아니라 건축 분야 전문가, 디지털 사이니지 전문가 등 다양한 분야 종사자들과의 토의를 통해 환자들이 병원에서 원하는 진료과를 쉽게 찾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예정이다.
김현정 센터장은 “기존 CS에 무게를 뒀던 문화는 고객 만족을 이끌기에는 한시적 결과만 낳았다”며 “환자가 병원을 오기 전부터 병원을 방문한 순간, 그리고 그 후 까지 고려해 근본적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김 센터장은 “모든 의료기관이 획일적으로 환자경험관리를 하는 것이 아닌 병원 자체의 특색을 살린 차별화된 전략을 적용해야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병원경영 한 축으로 자리잡은 ‘환자경험관리’
국내 의료기관은 지속적 성장기를 지나 현재 성숙기에 접어들었다.
지난해 통계를 보면 메르스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국민건강보험공단의 2015년 입원내원 일수 증가율이 전년 대비 0.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국내 의료기관 내 환자 증가세가 정체기에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국병원경영연구원 이용균 실장은 “병원 신규환자가 예전에는 7~8% 수준이었는데 현재는 계속 떨어지고 있다”며 “현재 환자의 90%는 재진환자”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 실장은 “재진환자가 절대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환자경험관리를 통해 환자 수의 선순환을 이끄는 중요성이 증가하고 있다” 말했다.
적극적인 환자경험관리가 의료기관의 환자 유출을 방지하고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하는데 효과적인 해결책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의료기관의 차별화된 특성을 반영한 환자경험관리는 소위 말하는 환자 유출도 방지할 수 있다.
정부도 최근 기존 환자 만족도 평가에서 나아가 의료기관을 이용한 후 환자가 느낀 경험을 객관화해 평가하는 ‘환자경험평가’ 도입을 논의 중이다.
일부 의료기관에서는 환자경험관리를 위해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교육, 홍보 활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경희의료원은 최근 4차례에 걸쳐 ‘신뢰받는 병원의 환자경험관리’를 주제로 직원 교육을 실시했으며 순천향대 부천병원도 지난 5월 ‘환자경험 워크숍&환자감동 선포식’을 가지고 준비에 돌입했다.
의료기관이 환자 수의 양적 충족을 위해 사활을 거는 시대는 이제 끝났다.
생활수준 향상 등 사회 분위기가 변화한 만큼 의료기관에 대한 높은 질 만족, 환자 안전 등 질적 수준을 우선순위에 둬야 할 필요성이 증가하고 있다.
성숙기에 접어든 의료기관들은 환자의 질적 요구를 충족하는 환자경험관리를 통해 자체 경쟁력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