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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사유재산을 공익법인화한 최초의 사례다. 해방 이후 계속됐던 국공립병원의 압도적인 우위 속에서 백인제의 백병원과 같은 사립병원들이 어떤 활로와 개선 방향을 모색했는지를 밝히는 작업은 한국 근대 사립병원의 발전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 의료체계 성장 동력과 제한점을 밝힐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줄 것이다.”
한국 최초의 민립공익법인 재단법인 백병원이 올해 설립 70주년을 맞이했다.
인제대학교 의과대학과 백병원이 창립자 백인제 박사의 정신을 되새기는 데 힘쓰고 있다.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은 창립자 백인제(白麟濟, 1899-?) 박사의 선각자적인 삶과 민립공익법인 설립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살피는 ‘백인제 기념 심포지엄’을 지난 9일 개최했다.
이날 신규환 교수는 “해방 후 사회혼란과 국가재건의 요구 속에서 백인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재건을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며 “그의 활동은 경제, 문화, 정치, 의료 등 다양한 방면에 걸쳐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백인제 박사는 조선산업진흥주식회사를 건립해 무역업에 관여했고, 수선사와 수선서림을 열어 출판문화의 향상에 기여하고자 했으며, 1948년 5·10 총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의료방면에서 그의 활동은 재단법인 백병원의 설립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서울대 의과대학 황상익 인문의학교실 교수는 “백인제 선생은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외과의사들을 많이 배출해 우리나라 외과학의 기반을 다졌다”고 평가했다.
백인제 박사는 1899년 1월 28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나 부호육영학교와 오산학교를 거쳐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경의전)에 진학해 의사의 길을 걷게 됐다.
경의전 재학 시절 나이가 가장 어린 편인데도 리더 구실을 하였으며, 또 학업에 정진해 수석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3・1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부단한 노력과 우에무라(植村俊二)와 사토(
佐藤剛藏) 등 일본인 스승들을 통해 의사와 의학자로서의 기초를 닦았다.
백인제는 복학해 1921년에 수석으로 경의전을 졸업했음에도 3・1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의사면허증을 받지 못하고, 2년 동안 총독부의원에 근무한 뒤에야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우에무라는 뒤에 자신이 설립해 운영하던 우에무라외과의원을 백인제에게 넘겨 백인제가 개원의사로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을 물려주기도 했다.
그는 1928년 6월 1일 스물아홉 나이에 모교의 외과 주임교수가 됐다. 일제강점기 동안 경의전의 주임교수가 된 사람은 백인제 이외에 미생물학교실의 유일준 뿐이었다.
백인제는 외과의사와 의학자로서뿐만 아니라, 한국인 의사와 치과의사들에 의한 최초의 전국적 조직인 조선의사협회를 창립하고(1930년) 운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1946년 12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공익법인 병원인 ‘재단법인 백병원’을 설립했다.
해방 이후 정치인, 사회활동가(흥사단), 출판인으로도 큰 활약을 했지만, 애석하게도 한국전쟁중인 1950년 9월 동생 붕제 등과 함께 납북되는 비운을맞아 우리나라 의료와 사회 발전에 더 큰 공헌을 할 기회를 잃게 됐다.
황 교수는 “그는 도산 안창호를 흠모하고 무엇보다 도산의 ‘무실역행’ 정신을 자신의 삶과 활동에서 구현하려고 애썼다”면서 “빈말보다 실천을 강조하고 목표를 향해 꾸준히 노력하는 역행(力行)을 본분으로 삼는 것이 바로 백인제의 삶이었고 또 우리가 그를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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