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년 연속 1위’. 고객만족도 조사결과를 알리기 위한 대형병원들의 홍보문구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표현이다. 지금이야 각 병원들의 진료 성적표가 모두 공개돼 있지만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병원들의 평가결과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시 각종 만족도 조사결과에 병원들은 목을 멨다. 하지만 최근 십 수년째 동일한 병원이, 동일한 만족도 조사에서, 동일한 순위에 오르는 일이 허다하다. ‘00병원은 00’라는 인식이 생길 정도다. 각 병원이 내세우는 그 무의미한 타이틀의 실체를 조명해 봤다.
만족도 평가 등 반응 민감할 정도로 폭발적
그랬다. 기자 초년병 시절 대형병원들의 평가결과가 공개되는 날이면 하루 종일 자료 입수 전쟁을 치렀다. 독자인 병원과 의사의 관심사 충족을 위해 기꺼이 밤잠도 반납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번 평가결과에서는 어느 병원이 1등을, 어느 병원이 꼴찌를 했는가를 두고 대한민국 병원계는 설왕설래(說往說來)했다.
A부터 Z까지 병원계의 모든 민낯이 공개되는 요즘과 달리 당시만 해도 병원평가 개념 자체가 생소했던 만큼 몇 안되는 평가결과에 대한 관심은 지극히 당연했다.
또 의료광고 등 병원들의 마케팅 활동이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었던 만큼 평가결과는 병원들 입장에서 놓치기 어려운 호재였다.
환자들에게는 병원 선택의 기준이었고, 병원들에게는 위상의 척도이자 자존심이었다. 그 만큼 관심과 경쟁은 치열했다. 적어도 10여년 전에는 그랬다.
하지만 2015년 현재 상황은 확연히 달라졌다. 평가결과에 목을 메는 병원들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다. 덕분에 더 이상 평가결과를 얻기 위해 밤잠을 설치지 않아도 된다.
이 같은 상황 변화의 결정적 원인은 정부 주도의 의료기관평가 도입이었다. 앞서 진행됐던 평가들의 주체는 민간이었지만 2004년을 기점으로 병원 평가 주체는 정부로 바뀌었다.
특히 진료수준에 대한 평가가 주를 이루면서 단순 만족도 수준에 그쳤던 기존 평가들 가치는 급격히 떨어졌다. 실제 민간단체 주도의 평가 대부분은 일반인 혹은 내원객을 대상으로 병원이용 만족도를 조사하는 수준에서 평가가 진행됐다.
브랜드파워 조사항목은 ‘종합병원하면 어디가 떠오르나’, ‘또 다르게 생각나는 병원은?’, ‘국내 14개 종합병원 리스트 중 가고 싶은 병원은?’ 등의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국가고객만족도지수(NCSI) 역시 의료기관에 대한 전반적 만족도를 중심으로 이용 전 기대 대비 만족도, 이상 대비 만족도 등이 평가항목이다.
서울 소재 대학병원 QI팀장은 “단순 설문조사 수준의 평가에 불과하다”며 “임상 질 지표 등 정작 중요한 척도는 포함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번 1등은 영원한 1등?
상황 변화의 또 다른 원인으로는 절대불변의 평가결과도 한몫했다는 분석이다. 실제 일선 대형병원들은 10년 이상된 고유의 평가결과 하나 쯤은 갖고 있는 실정이다.
삼성서울병원은 올해로 13년째 연속으로 ‘대한민국 브랜드스타’에 선정됐다. 종합병원 분야 첫 조사가 시작된 이래 단 한 차례도 1위를 내준 적이 없다.
병원은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이 주관하는 한국산업 고객만족도조사(KCSI, Korea Customer Satisfaction Index)에서도 16번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서울대학교병원 역시 2001년 이후 무려 15년 간 ‘브랜드파워’ 1위 자리를 수성 중이다. 이 조사 역시 한국능률협회 컨설팅이 주관한다.
서울아산병원도 고유의 타이틀이 있다. 병원은 9년 연속으로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종합병원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이 조사는 산업계 임원, 증권사 애널리스트, 일반 소비자 등 1명 이상을 대상으로 이뤄지며 주체 역시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이다.
서울아산병원은 일본능률협회컨설팅가 주관하는 글로벌만족도(GCSI: Global Customer Satisfaction Competency Index)에서도 7년 연속 1위를 달리는 중이다.
세브란스병원은 한국표준협회가 주관하는 한국소비자웰빙지수에서 지난 2007년 이후 8년 연속 1위 병원으로 선정됐다.
뿐만 아니라 한국대학신문이 대학생 대상 설문결과를 토대로 선정하는 최우수기업대상 병원 부문에서 8년 연속 선호도 1위를 차지했다.
수상한 성적? 단순한 결과
이 처럼 동일평가에 동일기관이 십 수년 간 1위를 차지하는 현상을 두고 일각에서는 평가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평가주체와 대상기관 간 모종의 관계 형성이 이뤄져 있는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평가주체들과 해당 병원들은 강하게 부인하지만 상황만 놓고 보면 오해 소지는 충분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국가고객만족도지수(NCSI, National Customer Satisfaction Index)다. NCSI를 주관하는 한국생산성본부는 스폰서십(Sponsorship) 제도를 운영 중이다. 스폰서로 가입하기 위해서는 연간 후원비 4000만원을 내야한다.
해당 금액을 지불한 기업에게는 자사 및 경쟁사에 관한 경영평가 분석보고서가 제공된다.
문제는 그동안 병원들의 성적과 스폰서십 가입 횟수가 비례하는 모습이 연출돼 왔다는 점이다. 스폰서 참여가 많은 병원이 1등도 많이 하는 구조라는게 공공연한 비밀처럼 알려질 정도로 의구심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한 대학병원 QI(Quality Improvement) 실장은 “스폰서 참여 횟수와 평가결과를 보면 의구심이 드는게 사실이라”며 “성적과 후원의 상관성을 부인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그 동안 NCSI 1위를 가장 많이 차지한 곳은 삼성서울병원으로 총 14회에 달한다. 이 기간 삼성서울병원은 스폰서십에 9번 가입했다. 병원계 최다 횟수다.
뒤를 이어 8번의 스폰서십에 가입한 세브란스병원은 최근 4년 연속 NCSI 1위를 달리는 중이다. 이밖에 경희의료원 3회, 서울성모병원 2회, 서울아산병원과 고대안암병원이 각 한 차례로 집계됐다.
한국생산성본부 관계자는 “NCSI 평가와 스폰서십은 별개의 사안”이라며 “먼저 평가가 이뤄진 후 필요에 따라 스폰서십을 가입하는 구조인 만큼 평가에 영향을 주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NCSI 평가대상 병원은 경희의료원, 서울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 강남성모병원, 서울대학교병원, 세브란스병원, 고대안암병원 등 7곳으로, 이 중 스폰서십에 참여하지 않은 기관은 서울대병원 1곳 밖에 없다.
△브랜드파워 △한국산업 고객만족도조사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등 국내 대형병원들을 대상으로 가장 많은 평가를 진행 중인 한국능률협회컨설팅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은 “별도 대상기관을 정해 놓지 않은 상태에서 응답자의 주관적 판단을 근거로 평가가 이뤄지는 만큼 객관성이 훼손될 가능성은 낮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평가 후 우수한 성적을 받은 병원이 해당 타이틀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비용을 지불하고 그 사용권한을 구매해야 한다. 구매비용은 산업군이나 규모별로 다르다.
한국능률협회컨설팅 관계자는 “10년 이상 단일기관이 1위에 선정됐다는 것은 오히려 조사의 신뢰성이 확보된 것”이라며 평가의 공정성 논란을 일축했다.
하지만 협회 측은 일선 병원들이 평가 후 타이틀을 사용하기 위해 지불하는 구매비용은 영업상 기밀이라며 공개를 거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