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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인제대서울백병원 W교수와 인턴들의 회식 자리. 교수는 남성 인턴에게 “평소 성생활을 어떻게 하느냐”, “성 욕구는 어떻게 푸느냐”는 등 성추행 발언을 쏟아냈다.
병원 측 조사 결과, 피해자는 해당 인턴뿐만이 아니었다. 파문이 일면서 병원은 발칵 뒤집어졌다.
W교수가 술자리에서 여성 인턴에게 술을 강요한 뒤 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추행한 사실도 뒤늦게 드러났다. 결국 인제대학교 징계위원회는 지난 2월 W교수에게 ‘파면’ 결정을 통보했다.
인턴·레지던트 등 전공의 인권침해 문제는 해당 병원만의 일이 아니다.
전공의 성추행 혐의로 기소된 K치과대학 박 모 교수가 지난해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2014년 5월과 6월 전공의 A씨의 허리를 끌어안거나 엉덩이를 움켜쥐는 등 4차례 성추행했다.
피해 전공의 A씨는 “오히려 동료나 직원들로부터 의심을 받았고 성추행 사건으로 병원을 떠나게 되는 등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었다”고 호소했다.
병원 내에서 이 같은 문제들이 계속되자 국가인권위원회도 나섰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최근 ‘의료기관 내 여성 근로자들의 인권침해 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그 심각성을 지적했다.
지난해 5월부터 10월까지 약 6개월간 전국 종합병원급 이상 12개 병원 소속 여성전공의 및 간호사·간호조무사 1130명을 대상으로 ‘보건의료분야 여성종사자들의 인권 실태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지난 12개월 동안 병원에서 신체폭력, 언어폭력, 성희롱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여성전공의가 상당수였다.
조사에 참여한 전공의의 55.2%는 언어폭력을 받은 적이 있고, 16.7%가 성희롱을 당한 적이 있으며 14.5%는 신체폭력을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가해자를 묻는 질문은 복수응답이 가능했는데 의사인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성희롱의 경우 의사와 환자가 각각 58.3%로 나타났고 신체폭력은 환자 66.6%, 의사 38.1%였다. 언어폭력은 환자보호자가 60.0%, 환자가 58.8%, 의사가 53.8%였다.
공동연구원으로 참여한 이상윤 녹색병원 과장은 “권리침해 정도로 봤을 때 여성전공의들이 간호직에 비해 훨씬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이유를 따져본다면, 간호직과 달리 여성전공의의 경우 인턴을 포함 5년만 버티면 처우가 달라지기 때문에 ‘5년만 기다리면 되는 것 아니냐’는 무언의 합의(?)가 있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위계적이고 폐쇄된 병원 조직 내에서 근로자이면서도 피교육생 신분이라는 이유로 전공의들이 인권을 보호받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전공의 B씨는 “성희롱은 간접적으로도 있고 직접적으로도 있는 것 같다. 교수님이 말하면서 엉덩이를 치거나 신체 일부를 만진다든지 등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화를 내거나 ‘교수님, 이건 성희롱이에요’라고 말할 수 없는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특히, 전공의들 사이에서도 폭력이 발생하는데 문제는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는 분위기가 깔려있다는 지적이다.
전공의 C씨는 “4년차가 1년차를 때리는 관습(?)이 너무 오래 쌓여있다 보니 이게 당연시 됐던 것 같다. 다들 농담처럼 말하는 분위기”라고 했다.
지난해 10월 국회에서 열린 보건복지부 종합 국정감사에서 ‘길병원 전공의 폭행사건’이 도마 위에 올랐다. 길병원 전공의 폭행사건 피해당사자 A씨가 직접 출석해 “제2의 길병원 사태를 막아달라”며 절규했다.
2012년 당시 길병원에서 수련을 받던 A씨는 일을 못한다는 이유 등으로 선배 전공의 B씨에게 10개월여간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폭언, 무릎 꿇고 손들기 식의 체벌, 반복적인 반성문 쓰기 등의 가혹행위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병원은 징계위원회를 열어 선배 전공의를 해임했지만, 그는 41일 만에 다시 병원으로 복귀했다. 병원으로 돌아온 그와 A씨가 다시 한 공간에서 일하게 됐고, 결국 후배 전공의는 선배가 복귀한 10여일 뒤 사직서를 내고 병원을 떠났다.
여성 인턴에게 욕설을 내뱉고 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기소된 정형외과 레지던트가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지난해 2월 서울중앙지법 형사 17단독 임정택 판사는 강요와 폭행 등의 혐의로 기소된 김모(35)씨에 대해 징역 4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검찰 조사에서 김 씨는 무릎을 꿇게 하는 등의 체벌과 함께 머리를 수차례 때리기도 했으며 “정형외과가 너에게 맞지 않으니 지원하지마” 등의 말과 함께 수차례 반성문을 쓰게 한 것으로 드러났다.
임 판사는 전문의 자격 취득 과정의 중요성과 도제식 교육 시스템이라는 특성을 인정하면서도 김씨 행태는 인격 모독적이었다고 판단했다.
임 판사는 “김 씨가 선배로서 교육을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스스로 그만두게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병원 내 폭력 문제를 단순히 일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한다면 피해는 계속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병원 내에서 폭력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심리학 용어로는 ‘공격자와의 동일시(identification with aggressor)’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폭행과 억압 등을 받으면서 폭력적인 환경에 노출돼온 사람이 결국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것인데, 병원 내 교수와 선배로부터의 폭력을 당한 의사가 결국 다시 후배 또는 동료에게 폭력을 가하게 되는 악순환과도 같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 법’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병원 내 폭력이 용인돼온 구조를 깨트려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법으로부터 제대로 된 보호와 단호한 처벌이 이뤄져야할 것이며, 병원 조직 내에서 보다 문제의식을 갖고 내부 문화 및 제도를 개선하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보건의료노조 이은영 수석부지부장(간호사)은 “모 병원에서 인턴 때부터 기구를 집어던지는 등 폭행과 폭언을 서슴지 않았던 의사가 전공의 때도 지속적으로 수술실 등 여러 장소에서 후배, 간호사 등에게 폭언과 폭행을 가했다. 그럼에도 아무런 조치 없이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병원 펠로우로 채용된 사례도 있다” 주장했다.
임상혁 노동환경건강연구소장은 “병원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성관련 폭력 ▲모성보호에 대한 폭력 ▲권력형 폭력 ▲환자 및 보호자 폭력 등 크게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병원 내 폭력과 성희롱은 개별 보건의료종사자가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직시해야 하며, 병원 경영진이 원내 폭력 금지 방침을 명확히 밝히는 등 이 문제를 적절히 예방관리하기 위한 체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보건복지부는 전공의 폭행사건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고민하겠다는 답을 내놨다.
복지부는 “향후 수련병원에서 폭력사건을 예방할 수 있도록 수련병원의 폭력예방, 폭력방지위원회 등 대체시스템에 대한 평가를 강화할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또 “전공의 관리시스템을 정비해 중도 퇴직자가 발생할 때 그 사유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방안 등 대한병원협회와 대책을 논의할 계획”이라고 했다.
더구나 전공의특별법이 지난해 말 국회를 통과한 이후 시행령·시행규칙 마련을 앞두고 있어, 전공의들 처우와 근로환경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개선될 수 있을 지 초미의 관심사다.
대한전공의협의회 송명제 회장은 “이 같은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해 전공의 특별법 하위법령 제정에 해당 내용들을 적극 반영해야 한다”며 “이는 환자 안전에까지 직결되는 만큼 관계부처는 물론이고 대한병원협회도 적극 협조할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