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 백만 명의 국민들이 하나의 뜻을 위해 모였던 촛불집회는 지난 9일 ‘탄핵 가결’을 얻어냈다. 하지만 곳곳에서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는 발언이 이어지고 있다. ‘헬조선’, ‘금수저·흙수저’, ‘개한민국’, ‘오포세대’ 등 현실을 냉소적 시각으로 표현한 신조어들이 아직 우리 세대에 만연한 것처럼 사회는 우리에게 안정감과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불안정한 사회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은 병을 앓고 있지만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
이 처럼 대한민국에 휩싸인 마음의 병에 대해 “별 일 아닌 듯 지나치기 쉬우나 심하면 고혈압이나 중풍 등과 같은 심혈관계 질환으로 발전할 수 있는 화병(火病)”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화병, 신체 증상을 동반한 우울증
을지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유제춘 교수[사진]는 “울화병이라고도 불리는 화병은 신체 증상을 동반하는 우울증으로 미국신경정신의학회의 정신질환에 대한 진단기준인 DSM-IV 부록에도 실린 공식 병명이다. 예전에는 표현이 자유롭지 못하던 중년 여성에게 흔하다고 알려졌으나 최근 암담한 현실로 남녀노소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증상을 토로한다”고 밝혔다.
화병은 불면, 식욕 저하, 의욕상실, 피로 등의 우울 증상 외에도 특징적인 신체 증상이 동반된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기도 하며, 답답하고 가슴 뛰는 증상이 생기기도 한다.
또 소화가 잘 안 되거나 명치에 뭔가 걸려 있는 듯한 느낌이 있고, 몸 여기저기에 통증이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우울감이 심해지면 자살에 대한 생각이 증가해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게 될 위험이 증가할 수 있다.
화병의 원인은 일반적인 우울증과 비슷하게 스트레스가 주원인이며, 갈등으로 인한 가정적 요인을 비롯해 가난이나 실패, 좌절 등 외부적인 요인도 상당 부분 기인한다.
특히 최근 불거진 사회적 이슈들과 사회 기득권의 행실에 대한 분노, 배신감 등의 감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박탈감과 무기력증, 우울증 등 화병 증상을 유발한다.
개인의 성격적인 특성상 속상함, 억울함, 분함 등의 감정을 쉽게 풀어내지 못하고 담아두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유제춘 교수는 “위계질서를 미덕으로 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피력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이나 가족들에게도 자신의 생각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환경에 순응하고 살던 사람들이 갑작스런 일들로 당혹감과 실망, 분노, 불만의 감정이 동시에 나타나 결국 신체증상으로 표출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서변화 + 신체증상
유제춘 교수는 “화병은 우울증과 같이 일차적으로 정신적 증상이 나타난다. 환자 대부분이 사소한 일에도 짜증과 신경질을 내는 등 예민한 상태가 지속되고, 분노와 화를 참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억울함과 분한 감정을 자주 느끼며 공격적인 성향이 매우 강해진다. 이 외에도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불면증을 겪게 되기도 하고, 한숨이 늘고 우울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신체 증상으로는 온 몸에 열이 나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목이나 가슴이 조여와 답답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간혹 속이 쓰리며 메스꺼움을 느끼고, 이로 인해 식욕 장애나 소화 장애를 겪기도 한다. 심하게는 만성적인 분노로 인한 고혈압이나 중풍 등의 심혈관계 질환의 발병 혹은 악화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이러한 신체적인 증상은 자율신경계 중 교감신경 흥분으로 스트레스 호르몬이 지나치게 많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신적인 증상, 즉 마음의 불편이 신체적인 증상으로 이어진다. 화병으로 인한 증상이 건강에 대한 염려를 하게 만들고, 이 때문에 불안을 느끼다 보면 더욱 악화될 수 있어 총체적인 악순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유제춘 교수는 “우울감 등 정신적인 증상과 두통, 소화불량, 전신통증 등 신체적인 증상이 2주 이상 동반됐다면 전문의를 찾아 정확한 진단을 받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소통과 감정교류, 화병 예방에 효과적
화병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 방법을 익혀 가슴 속의 응어리를 풀어야 한다. 또 화가 난다고 해서 그 즉시 화를 내면 더욱 악화된다. 마치 불발탄을 해체하듯 천천히 침착하게 화를 다스리며 풀어야 한다.
유제춘 교수는 “환자들의 유형을 살펴보면, 취업이나 진로 혹은 실직, 정년퇴직, 경제난, 자녀 문제 등 다양한 원인으로 무력감, 상실감, 분노 등의 갑작스럽게 화병의 증상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문제를 혼자서 안고 고민하기보다 공감해줄 수 있는 가족이나 지인들과 소통하고 느끼는 감정을 나누는 게 우울감을 예방에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특히 가벼운 증상으로 소홀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으므로, 우울감과 상실감, 분노 등의 감정이 커져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 빠른 시일내에 전문의를 찾아 정확한 진단을 받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