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의료 분야에서도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 같은 키워드가 언급되는 일이 늘어나고 있지만 정작 인공지능을 통해 임상의사 및 연구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얻고 있는지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의학 지식을 학습한 인공지능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인공지능이 알아듣기 쉽도록 정돈된 지식의 집합체 즉 빅데이터가 필요한데, 이는 단기간에 구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인 허혈 뇌지도 작성에 성공해 이름을 알린 바 있는 동국대 일산병원 한국인 뇌MR영상 데이터센터의 성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뇌MR영상 데이터센터장인 김동억 교수 연구팀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통해 빅데이터를 구축하고 이를 인공지능에게 학습시켜 의료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를 만들어 낸 보기 드문 사례다.
센터가 구축한 ‘뇌지도’의 바탕은 MR영상이다. 뇌 질환 분석은 MR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다. 이미지를 보고 병변의 크기 및 위치를 분석하고 이를 기존 병력 등 환자 정보와 결합해 증상을 판단하고 예후를 파악한다.
일정한 분석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련 과정을 거쳐야 한다. 영상자료를 정량적으로 학습할 수 있게 끔 정리하면 연구와 교육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것이 김동억 센터장의 아이디어였다.
김동억 센터장은 “처음에는 인공지능을 도입할 생각이 없었다. 의대생과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MR데이터를 정리하는 것이 목표였다”며 “데이터를 정제하고 나니 인공지능이 학습하기 쉬운 형태가 돼 적용하기에 이렀다”고 설명했다.
김 센터장은 “MR영상을 제공한 환자의 신체사항과 병력 등 임상자료를 함께 모으기 위해 700개에 달하는 항목을 만들어 데이터에 추가하고 컴퓨터가 인식하기 쉬운 이미지를 선정하는 작업을 5년 이상 꾸준히 했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데이터의 정량구축을 위해 센터가 개발한 소프트웨어 ‘Image_Q NA’가 사용됐다. Image_Q NA는 뇌졸중에 관련된 뇌병변을 좌표 공간 위에 분할한다. 아날로그 방식에서 ‘왼쪽 어디쯤’이라고 불러야 했던 병변은 이 과정에서 x축과 y축의 좌표 값을 가진다. 뇌 속 병변 위치와 크기 등이 분석 가능한 수치로 변환되는 셈이다.
이렇게 재가공된 데이터를 이용하면 MR영상 소견과 임상 소견이 결합된 새로운 가설을 수립하는 연구가 가능하다. 현재까지 11개 대학병원의 1만5000명에 이르는 환자 데이터가 등록돼 있다.
김 센터장은 “과거 아날로그적 작업을 해야 했던 뇌질환 연구에 몇 백 건 정도의 데이터가 활용됐던 것을 고려하면 혁신적인 변화”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센터는 뇌지도를 통해 뇌질환을 겪는 환자들의 등수를 매기고 이에 따른 예후의 차이에 관해 연구한 논문에서 5000여 명에 달하는 데이터를 활용했다. 해당 논문은 저명 학술지인 ‘Brain’에 게재됐다.
김 센터장에 따르면 변환된 데이터를 학습한 인공지능은 이제 인간 못지않은 실력으로 병변이 존재하는 영상을 찾아내고 오류를 발견한다. 센터는 최근 원하는 임상자료를 입력하면 그에 맞는 MR영상 및 그 특징을 분석해 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다.
이미지를 분석해 진단에 도움을 주는 인공지능의 가장 큰 장점은 이전에는 소수 전문의만이 할 수 있었던 작업을 다른 의사들도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김 센터장은 “뇌경색 원인 진단에 따라 뇌졸중 예방약이 변화한다. 신경과 전문의 중에서도 뇌졸중을 전공한 의사들 정도가 이를 비교적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 굉장히 제한된 인력인 셈”이라며 “정확성을 높인 진단 보조 AI가 있다면 전공이 아닌 의사들도 판별에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를테면 심전도를 판독하는 의료기기 출현으로, 단순한 사실 확인에도 일일이 심장내과 당직의를 찾아다니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다. 전문의들은 보조 프로그램을 사용해 오판 확률을 줄이며 소모적인 작업에 대한 부담을 덜고 중환자에 집중할 수 있고, 뇌질환을 전공하지 않은 의사들이라도 MR영상에 대한 분석 정보를 얻고 다학제적 진료를 실현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유럽에서는 상당수의 뇌질환 환자가 CT 촬영만을 하는 반면 국내에서는 뇌졸중 환자의 90%가 MRI 촬영을 할 정도로 해외보다 접근성이 높다. 그러나 연구를 위해서는 데이터를 표준화해야 하는 탓에 수집 과정에서부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 김 센터장 또한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의 국가표준화 과제 수행을 통한 장기간의 작업 끝에 지금의 핵심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
김동억 센터장은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붐이 일어나기 전부터 꾸준히 데이터를 축적해 왔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효용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뇌지도 작업은 시작에 불과하다. 예후, 예측 지도나 건강보험 심사 시 과잉진료 판단 여부, 환자 장애등급 판정 등 다양한 분야로 데이터 활용을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데이터 공유 네트워크가 강력해져 더 많은 쓰임새가 발견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