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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지방 최초의 3·1운동 발상지이자 6·25전쟁 마지막 보루였던 호국충절의 고장 경남 창녕군 남지읍.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양 끝으로 창녕 남지와 함안 칠서를 잇는 철교 2개가 나란히 있다. 하나는 등록문화재인 파란색 옛 남지철교, 다른 하나는 빨간색 새 남지교다. 1931년 가설 공사를 시작으로 1933년 2월 개통된 옛 남지철교는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교량 중 하나로 평가 받았다. 6·25전쟁 때 북한의 도하를 막고자 폭파됐다가 복구되는 아픈 역사를 겪기도 했다. 1993년 7월 차량 통행이 금지되며 새 남지교가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지리적 요충의 소임을 이행하던 그 시절 남지철교 옆 문전성시를 이루던 약국 하나가 있었다. 이름하여 ‘철교 김약국’. 도외 병원에서 포기한 환자도 살려낸다는 말이 오갈 정도로 지역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한 약국이었다. 이 철교 김약국집 둘째아들이 바로 한국 노인의료의 선구자인 한국만성기의료협회 김덕진 회장이다.
노인의료와의 인연 유수와 같은 세월 속에 ‘철교 김약국’은 창녕 남지의 역사로 남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김약국집 세 아들 모두 병원밥을 먹고 있다.
의사가 된 형님과 동생은 의료 일선에서 직접 환자들을 진료하고, 둘째아들은 병원경영 전문가로 대한민국 노인의료의 역사를 새겨 가는 중이다.
‘대한민국 1호 노인병원’ ‘비의료인의 성공신화’ ‘노인의료의 산증인’ 등 그의 이름 석자에 붙는 수식어가 십 수개일 정도로 김덕진 회장의 존재감은 절대적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도 그의 업적과 능력을 십분 인정, 대선과정에서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직능총괄본부 보건의료본부 노인의료대책위원장 직함을 부여했다.
고령화 시대로 접어든 대한민국은 향후 노인의료 문제에 직면하게 될게 자명하다고 판단했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로 김덕진 회장을 낙점한 것이다.
정계에서도 인정받는 작금에 이르기까지 김 회장의 인생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거듭되는 실패에 좌절하고 남몰래 눈물을 훔치며 담았던 절치부심이 부지기수다.
유복한 가정은 물론 병원으로 성공한 형님의 휘하에서 얼마든지 평탄한 삶을 누릴 수도 있었지만 유년시절부터 지녔던 호방한 성격은 현실안주를 용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일본 출장에서 우연찮게 접했던 ‘노인의료’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사회적 약자인 노인을 위한 의료이기에 보람 있고, 사업성도 탁월하다고 판단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요양병원’이란 개념 정립 조차 없었던 만큼 이웃나라 일본을 수 없이 드나들며 개원을 준비했다.
절망 속에 찾은 희망 드디어 1992년. 경남 창녕 부곡에 대한민국 1호 노인전문병원이 문을 열었다. 우리나라 노인전문병원 역사의 시발점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시설과 시스템 등 모든게 완벽했지만 정작 환자가 없었다. ‘노인요양병원=고려장’이라는 국민 정서를 깨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언젠가는 되겠지…’라는 심정으로 병원에만 매달렸지만 불어나는 부채를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부도 금액만 60억원. 너무나 비싼 인생 수업료였다.
재기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 좋아하던 술도 밀려오는 자책과 괴로움을 달래주지는 못했다. 노인의료가 국운(國運)을 좌우할 명제임이 분명해 보였지만 당시 시대상황은 김 회장의 혜안을 인정하지 않았다.
덧없는 방황만 수 개월.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린 그는 ‘출발점에 답이 있을 것’이라며 자신에게 노인의료의 꿈을 이식해준 일본을 다시 찾았다.
과연 그 곳에는 답이 있었다. 수시로 일본을 드나들며 사귄 절친이자 ‘노인의료’의 길을 함께 걷고 있던 고쿠라리하빌리테이션 하마무라 원장이 그 답을 줬다.
하마무라 원장은 실패에 괴로워 하는 친구의 어깨를 두드리며 “힘들어도 믿음을 갖고 끝까지 해보자”고 독려했다. 술자리의 흔하디 흔한 이 말 한마디가 김 회장에겐 결정적이었다.
-60억 → 200억 '인생 역전' 그랬다. 열정으로 노인의료에 다가섰지만 믿음이 없었다. 국가 차원에서 노인의료의 절박함을 호소할 때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결여돼 있었다.
그러기 위해 한국에는 노인의료 선구자가 필요하고, 자신이 그 역할을 해야한다는 신념과 믿음을 무장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이념과 철학’이 뚜렷해진 그에게 거칠 것은 없었다. 부도 이듬해 5월 직원 5명을 데리고 노인의원을 개원했고, 1년 후에는 입원실도 갖추며 기반을 닦았다.
사업운도 따라줬다. 노인주간보호사업과 노인단기보호사업을 잇따라 승인 받았고, 1999년에는 노인전문병원사업 시행자로 선정됐다.
승승장구 끝에 2001년 사옥을 매입, 이전했고 명칭도 노인의원에서 현재의 희연병원으로 변경했다. 이 때부터 진정한 노인의료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무서운 가속도였다. 2002년 희연평생교육원을 개원, 호스피스팀을 발족했다. 2003년에는 노인전문간호센터와 노인 전용 실버타운도 조성했다.
믿음과 소신으로 달리다 보니 돈은 덩달아 따라왔다. 2002년 25억이던 매출이 10년 만에 140억을 돌파했다. 60억 부도 인생이 200억 자산가로 탈바꿈 하기까지 채 15년이 걸리지 않았다.
더욱이 노인의료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에서 거둔 성과이기에 더욱 값졌다.
노인의료, 새역사를 쓰다 완연한 기반을 닦은 그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중앙무대로 뛰어 들었다. 시골 병원에 비의사 출신임에도 이미 노인의료의 거목이 된 그를 홀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한노인요양병원협회 회장에 오른 그는 140개에 불과하던 회원병원 수를 단숨에 500개로 끌어 올리며 결집력을 강화시켰고, 각종 규제에 맞서 요양병원들의 권익보호에 앞장섰다.
급변하는 요양병원 정책의 소용돌이에 우왕좌왕하는 회원병원들을 위해 개최했던 수 십 차례의 연수교육 모두 만원 사례를 이루는 진기록도 세웠다.
무엇보다 환자 삶의 존경에 기인한 ‘신체구속 폐지 한국 선언’은 김덕진 회장이 재임기간 일궈놓은 업적의 백미로 꼽힌다.
뿐만 아니라 ‘변화의 시작은 배움’이라는 소신으로 요양병원 종사자 대상 일본 현지연수를 진행, 서비스 진일보를 유도하고 있다. 현재 연수 횟수만 50회, 참가자도 1000여 명에 달한다.
굵직굵직한 행보로 단기간 국내 노인의료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정립한 김 회장은 요양병원협회를 떠난 이후에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력으로 노인의료 일선에서 종횡무진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만성기의료협회 회장과 일본 동경에 본부를 둔 아시아만성기의료협회 부이사장을 겸하며 국내 노인의료의 위상 강화에 한창이다. 대규모 학술대회도 준비중이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와중에 김 회장은 얼마 전 숙원 하나를 풀었다. 남지철교 옆 김약국집 터에 들어선 마당 널따란 별채는 십 수년을 가슴에 품어온 그의 꿈이었다.
그렇다고 이 곳을 호화스런 별장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별채에서는 거의 매일 세미나와 간담회가 열린다. 물론 주제는 노인의료와 요양병원이다.
참석자도 희연병원 내부 직원들부터 국회, 정부, 언론까지 다양하다. 국내 노인의료의 현실과 개선방향 등의 설전이 연일 되풀이 된다.
철교 김약국집 둘째아들은 유년시절 뛰놀던 바로 그곳에서 대한민국 의료를 가슴에 품고 오늘도 노인의료 발전을 위한 또 다른 일전을 준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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